재판 지연 해소보다 중요한 것 [뉴스룸에서]
김원철 | 사회부장
‘문건이 외부에 공개되어 법원행정처가 곤경에 빠지자, V이 W을 통해 (…) 요구를 받았다는 내용, V이 불상의 법원행정처 관계자로부터 (…) 요구를 받았다는 내용, (…) BR에게 (…) 지시하였다는 내용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난 2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 재판 1심 판결이 있었습니다. 전직 대법원장이 수사 대상이 된 것도, 구속되어 수감된 것도, 4년11개월이라는 최장 심리 끝에 1심 판결이 나온 것도 모두 초유의 일입니다만, 가장 역사적인 건 판결문의 길이입니다. 무려 A4용지 3160쪽입니다. 선고하는 데만 4시간30분이 걸렸습니다.
‘선고’에 긴 시간이 걸린 만큼 ‘공개’에도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람 이름이나 법인, 단체명을 모두 ‘비실명화’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선고한 지 닷새가 지난 31일 오후가 되어서야 판결문을 공개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형태로 말입니다.
확신합니다. 판결문을 작성한 판사라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요. 비실명화를 거쳐 판결문을 ‘공개’하는 게 아니라, 비실명화에 기대 판결문을 ‘비공개’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비실명화 판결문은 2심, 3심으로 가면서 더 복잡해지곤 합니다. 특히 일부 피고인이 항소하지 않는 등의 이유로 피고인 수가 달라지면 1심 판결문의 A와 2심 판결문의 A가 다른 인물이 되기도 합니다. 이 정도에 이르면 암호해독 기술을 동원해야 하는 수준입니다.
실명 판결문을 구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법원도서관에 가면 됩니다. 일반인도 그곳에 가면 실명 판결문을 볼 수 있습니다. 컴퓨터 6대에서만 조회가 가능하고, 예약하려면 전국 수만명의 변호사, 기자, 로스쿨 학생들과 피 튀기는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입니다. 눈으로만 봐야 하고 적어올 수 없다는 제약도 있지만, 비상한 기억력으로 판결문을 모두 외우면 되니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노력하면 실명 판결문을 볼 수는 있습니다.
이 경로를 제외하면 변호사라 해도 합법적으로 입수할 수 있는 판결문은 비실명 판결문뿐입니다. 대한민국 법원은 전체 판결문 중 일부만 공개하고, 그나마도 모두 비실명화합니다. 등장인물이 공인이든 사인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에 관한 내용이든, 온 세상이 다 아는 내용이든 따지지 않습니다. 4시간30분에 걸쳐, 공개된 법정에서, 실명을 포함해 모든 내용을 읽어 내려갔고, 방청석에 앉은 수십명의 기자들이 실시간으로 받아쳤으며, 이를 토대로 수백개 기사가 나온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판결문조차 닷새에 걸쳐 비실명화합니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요? 미국 연방대법원은 누리집(홈페이지)과 연방정부 인쇄국 누리집 등을 통해 선고된 사건의 판결문을 전면 무료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소송관계인의 이름뿐만 아니라, 소송 과정에서 법원에 제출된 소송기록도 누구나 열람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미확정 판결문일지라도 24시간 안에 누리집에 공개합니다. 중국도 정부가 운영하는 사이트를 통해 하급심 판결문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헌법 제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을 공개하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법원은 개인정보보호법을 이유로 판결문을 ‘비공개’합니다. 공개하려면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민감한 사생활이 담긴 판결문뿐 아니라 공인이 벌인, 공적 사안에 관한 판결문조차 무차별적으로 비실명화하는 법원의 태도는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이라는 설명을 구차하게 만듭니다.
판결문 비공개는 사실상 재판 비공개입니다. 헌법이 재판 공개를 요구하며 상정한 여러 순기능을 삭제합니다. 법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해석되는지 당사자는커녕 변호사도, 기자도 제때, 정확히 파악하기 힘듭니다. 어떤 판사가 어떤 논리로,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종합적으로 비교·분석하는 연구도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헌법과 법률에 의한 통치를 천명하면서, 그 법의 해석과 적용 예를 깜깜이 속에 두는 건 모순입니다. 재판 지연 해소가 제1의 과제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신속한 재판이라 한들 ‘비공개’라면, 그저 존재하지 않는 재판 아닐까요?
won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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