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zine] 영혼의 풍경, 백록담과 오름①
(제주=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원초적 적막감과 아득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제주의 아름다움은 화산 활동에서 왔다. 제주도는 약 180만 년 전에 생성됐다는 게 정설이다.
제주 탄생의 비밀…불과 물의 격렬한 만남
제주도 일대는 원래 얕은 바다였다. 깊숙한 지하에서 올라온 뜨거운 마그마가 바닷물을 만나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면서 더는 물에 잠기지 않는 높이의 지형이 형성됐다.
해수면 위로 육지가 드러난 뒤에도 화산활동은 계속돼 마그마가 분출했고, 분출한 마그마는 용암 대지와 수많은 오름을 만들어냈다.
화산활동은 약 1천 년 전까지 계속됐을 정도로 제주도는 젊은 화산도이다. 화산 지형의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이다.
제주의 영혼…백록담과 오름
섬 가운데서 수만 년 전 강력한 마그마가 집중적으로 분출해 한라산(1,947m)이 탄생했으며, 약 2만5천 년 전 한라산 정상에서 다시 용암이 분출해 백록담이 생겨났다.
제주도가 곧 한라산, 한라산이 곧 제주도인 '신비의 땅'은 물과 불이 뜨겁게 조우한 결과였다.
제주도에서 산은 '오름'이라고 불린다. '오름'은 산 또는 봉우리를 뜻하는 제주 사투리. '높다' '오르다' '성스럽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작은 화산체인 오름은 용암 분출구였던 분화구, 화산재가 쌓인 언덕인 분석구를 가진 게 특징이다.
오름은 생김새와 차림새가 다채롭다. 비고(경사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정상까지 높이)가 100m 내외인 오름은 그 자체로 풍광이 아기자기하고 신비스럽다.
오름 정상은 이에 더해 시원스러운 제주 풍광을 선사한다. 정상에 서면 동서남북의 주변 오름들과 넓은 평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바다마저 가깝게 보인다.
많은 오름이 높지 않고, 오르기 쉬워 제주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 사이에도 답사 열풍이 일고 있다.
제주도에는 등록된 오름만 368개이다. 단일 섬에 있는 소화산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다. '오름 왕국'이라 불릴 만하다.
소형 화산체가 많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에트나 화산이 거느리고 있는 소화산 수는 260여 개이다.
오름은 주로 해발 고도 200∼600m 사이, 중산간지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물론 해안 저지대나, 백록담 코 밑에도 오름은 수십 개가 있다. 제주 동쪽 끝 우도에 있는 쇠머리 오름, 지미봉, 성산일출봉, 세계 화산학 교과서로 통하는 수월봉, 송악산 등은 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다.
윗세오름, 어승생악, 사라오름, 오백장군, 방애오름, 삼각봉 등은 대표적인 고지대 오름이다.
섬 한복판에 우뚝 솟아, 오름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한라산과 백록담은 오름의 맹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라산 정상의 화구호인 백록담은 남북 길이 400m, 동서 길이 600m, 둘레 1,720m, 깊이 108m의 타원형 분화구이다. 흰 사슴을 탄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물을 마셨다는 전설을 간직한 백록담의 설경은 신령스러웠다.
신들의 고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한겨울 쌓인 눈이 여름까지 남아 있어 녹담만설(鹿潭晩雪)로 일컬어지는 백록담 설경은 영주 10경의 하나로 꼽힌다. '영주'(瀛洲)는 제주도의 옛 이름이다.
제주 불교 재건과 중흥 도량, 관음사
백록담으로 오르는 길은 관음사 탐방로, 성판악 탐방로 등 2개이다. 모두 왕복 20㎞ 가까이 되는 긴 여정이다.
성판악 코스는 오르막이 덜 가파르다. 관음사 코스는 경사가 급해 오르기 힘들지만, 계곡이 깊고 산세가 웅장해 한라산의 참모습을 선사한다.
관음사 코스는 제주 불교의 중심인 관음사 근처에서 시작한다. 제주 전설, 민담 등에 괴남절(제주 방언으로 관음사), 개남절, 동괴남절, 은중절이라고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관음사는 오래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억불정책으로 인해 1700년대 제주 전역의 사찰이 모두 훼철되면서 관음사도 사라졌다. 현대의 관음사는 일제 강점기인 1909년 안봉려관(1865∼1936)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제주 출신으로, 1907년 비구니계를 수계한 안봉려관은 제주 불교를 중흥시킨 큰 스님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였고 선구적 여성이었다.
그는 토굴에서 6년간 수도한 끝에 관음사를 창건함으로써 200여 년에 걸친 제주 무불 시대를 마감했다.
이후 법화사, 불탑사, 법정사, 월성사, 백련사 등을 중창 또는 창건했다. 제주 최초·최대 항일 투쟁인 법정사 무오항일 항쟁 때는 활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다.
여성의 사회 참여에 선구적 역할을 한 안봉려관은 강인한 정신과 생활력을 표상하는 제주 여성의 전형을 보인다. 템플스테이를 지도하는 비구니스님의 표정에서 활달한 기상이 느껴지는 것은 안봉려관이 생각나서일까.
한라산은 제주 4·3의 아픈 기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한라산 650m 기슭에 자리 잡은 관음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4·3 당시 한라산에 있던 모든 사찰은 불태워졌다. 한라산으로 잠입한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고, 무장대와 토벌대 사이의 격전에 따른 것이었다.
관음사 지역도 토벌대와 무장대가 첨예하게 대치했고, 이 과정에서 관음사는 모든 건물과 시설이 불탔다. 관음사 주변 일대에는 크고 작은 경계 참호와 부대 숙영 시설이 설치됐는데 참호, 진지 등 일부 유적이 보존돼 있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낸 참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먹이를 찾아 헤매는 노루 두 마리가 참호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관음사는 1969년부터 대웅전을 시작으로 선방, 영산전, 해월각, 사천왕문, 일주문, 종각 등을 재건하거나 새로 갖췄다.
제주도민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미륵대불, 평화대불도 조성했다. 현재는 조계종 제23교구 본사로 30여 사찰을 관장하는, 제주 불교의 중심이다.
탐라계곡·개미등·삼각봉
관음사 코스에는 구린굴, 탐라 계곡, 개미등, 삼각봉, 용진각 계곡, 왕관릉, 장구목 등의 경승이 이어진다.
길이 40m의 구린굴은 해발 680m 지점에 있어 한국 용암 동굴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탐라 계곡은 제주도 대표 계곡이자, 한국의 3대 계곡으로 꼽힌다.
한라산에서 가장 깊은 계곡으로, 가파른 비탈과 급경사 때문에 사고 위험이 높아 등산객 안전을 위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설치돼 있었다.
개미목으로도 불리는 개미등은 화산침식잔구의 일종인 산등성이로, 해발 1천200m 지점에 있다.
삼각봉은 꼭대기가 삼각추처럼 생긴 오름이다. 해발 1,695m로, 보기에도 아찔할 만큼 바위 전체가 벼랑이었다.
삼각봉부터 백록담까지 2.7㎞는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힘들 정도로 경사가 급해 대부분의 산객이 부담스러워하는 구간이다.
두통, 구토 등의 고소증이 나타날 수 있는데 "천천히 발길을 옮기면서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게 필요하다"라고 탐방을 도와준 김동진 제주산악구조대원은 조언했다.
개미등과 삼각봉 대피소에서 내려다보는 제주시 일대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대피소 전망대에 서니 한라산 고원 초원지대가 드넓게 펼쳐졌고 크고 작은, 분화구 모양이 제각각인 여러 오름을 조망할 수 있었다.
우뚝우뚝 솟은 오름들은 성스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고, 오름 군락은 신들의 군상처럼 위엄 있었다. 예부터 한라산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일컬어지며 신들이 사는 곳으로 여겨졌다.
오름 '바이블'로 통하는 '오름나그네 1,2,3'을 집필했던 김종철(1927∼1995)은 "올림포스가 그리스 신화의 신의 거처라면 한라산을 비롯한 오름들은 제주신화의 신들의 고향이다"라고 통찰했다.
용진각 계곡은 백록담 북벽과 장구목, 삼각봉, 왕관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히말라야를 떠올리는 수직 암벽은 산악인들의 동계 훈련 장소이기도 하다.
2007년 태풍 '나리'로 폭우가 쏟아지면서 백록담 북벽에서부터 암반과 함께 급류가 쏟아져 계곡 지형이 크게 변했다. 용진각 대피소는 그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왕관릉은 모양이 왕관을 닮은 오름이다. 암벽이 깎아지른 듯 수직을 이루었다.
거대한 장구가 가로놓여 있는 모양이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 장구목은 해발고도 1,813m로,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오름이다. 곳곳에 거대한 바위가 많고 조릿대, 진달래, 누운향나무 등이 군락을 이룬다.
눈 덮인 백록담을 둘러싼 능선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새해 벽두에 한라산 정상에 오른 내외국인 탐방객들은 백록담 표지석을 안고 기념 촬영을 하기 위해 수백m에 이르는 긴 줄을 짓고 있었다. 새파란 겨울 창공에서 내리쬐는 햇볕은 그들을 축복하는 듯 따사로웠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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