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싸우고 사랑하는 작가 정보라의 자전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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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저주토끼'로 영국 부커상과 미국 전미도서상 등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에서 잇따라 최종후보에 오르며 'K-문학'의 기세를 떨친 정보라 작가의 본업은 대학 시간강사였다.
정보라의 신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래빗홀)는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과 부당한 처우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작가가 자전적 내용을 듬뿍 담아 쓴 유쾌 발랄한 연작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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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감으로 잡아먹히는 외계 문어 등 기상천외한 이야기 6편 수록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이 남자와 결혼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질 줄 알면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끌려 나가 사라지더라도 어쨌든 끝까지 고개를 높이 들고 목청껏 외치면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정보라 단편소설 '대게'에서)
소설집 '저주토끼'로 영국 부커상과 미국 전미도서상 등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에서 잇따라 최종후보에 오르며 'K-문학'의 기세를 떨친 정보라 작가의 본업은 대학 시간강사였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서 미국 예일대에서 석사를, 인디애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러시아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강사로 대학 강단에 섰지만, 시간강사들의 처우와 관련법 등 노동 현실은 교육자로서의 사명과 의욕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단에서 투쟁의 현장으로 뛰어든다.
정보라의 신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래빗홀)는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과 부당한 처우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작가가 자전적 내용을 듬뿍 담아 쓴 유쾌 발랄한 연작 소설집이다.
첫 수록작 '문어'는 문어같이 생긴 외계 생명체가 대학 강사들의 농성장에 등장했다가 해물을 특히나 좋아하는 '위원장'에게 붙잡혀 문어회로 잡아먹혀 버린다는 코믹한 설정의 작품이다.
곳곳에 유머와 위트가 장착된 이 소설은 그러나 웃기기만 한 건 아니다. 작가가 능수능란하게 짜놓은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들은 강사법 제정 이후 법의 편법 적용으로 인한 노동환경 악화와 대량해고 사태에 직면한 시간강사들의 문제, 처절한 농성 현장의 모습 등 우리 현실 속 노동과 교육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학생들을 사랑했고 강단을 사랑했고 교육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다. 그것이 내 존재의 의미였다. 그러므로 싸워보지 않고 학교가 원하는 대로 조용히 사라져줄 수는 없었다."(단편 '문어'에서)
'문어'를 비롯해 '대게', '상어' 등 총 6편의 연작소설이 담긴 이번 신작엔 작가의 분신인 '나'와 그의 남편인 '위원장' 두 인물이 고정적으로 나온다.
이 둘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찰떡같은 호흡을 보여주는데, 실제 정보라 작가와 남편(임순광 전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위원장)의 일상 대화를 그대로 소설로 옮겨놓은 듯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쉰다.
신작엔 정보라 작가가 투쟁의 현장에서 남편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스토리 등 실화가 많이 녹아 있다. 기상천외한 SF적 설정만 아니라면 작가의 실제 삶을 기록한 에세이로도 읽힐 수 있을 만큼 솔직하다.
작가는 자신의 이런 실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판타지와 로맨스, 사회소설, 코미디 등의 장르를 종횡무진 넘나드는데, 모두 포항이 배경이다.
작가가 포항으로 간 건 이곳이 고향인 남편을 따라서다. 그렇게 포항에서 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간병하고 또 작품 활동을 병행한 지도 2년이 넘었다고 한다. 작가가 당초 구상했던 신작 소설집의 제목이 '포항 소설'이었던 만큼, 책에는 배경인 포항에 관한 얘기들이 많다.
수록작 '해파리'와 '고래'는 작가가 학교를 그만두고 예정에 없던 전업 작가가 돼 포항에 살면서 삶의 관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기록한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정보라는 '작가의 말'에서 "경북 지역에는 산업단지가 많다. 남편이 비정규교수노조 위원장을 (맡아 두 번이나 연임한 뒤에) 그만두고 노동조합 상근자로 일하고 있어서 나는 포항 주변 여러 산업단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알게 됐다"고 적었다.
해외에서 잇따라 호평받으면서 이른바 'K-문학'의 아이콘 중 한 명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현실의 정보라는 쓰는 사람이자 '싸우는 사람'이다.
이번 소설집의 제목처럼 누군가 끊임없이 "항복하라"고 투항을 종용해도 그는 계속 싸울 것이라고 작중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한다. 수록작 '문어'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다. 나와 위원장님은 데모하다 만났고 나는 데모하면서 위원장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함께 데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교육 공공성 확보와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 해방과 지구의 평화를 위해 계속 함께 싸울 것이다. 투쟁."
268쪽.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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