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이라는 단어의 앙상함
[세상읽기] 박복영 | 경희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보좌관
나는 대학에서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 경제를 강의한다. 선진국 학생들은 현재의 한국에, 개발도상국 학생들은 과거의 한국에 관심이 많다. 선진국 학생들은 자신들이 태어날 때부터 한국은 선진국이었기에 가난했던 한국에는 관심이 없다. 개도국 학생들은 한국의 성장 과정과 자기 나라 상황을 비교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 수업 시간에 전쟁의 폐허 위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수출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육성했다고 열심히 설명한다. 구체적 정책 수단과 그 성과는 각종 통계를 보여주며 설명한다.
몇몇 학생들은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한국은 어떻게 극심한 정치적 부패를 피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 자신들은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다. 과거 한국이 매우 부패한 사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도둑정치’라 불릴 만큼 극심한 다른 개도국의 부패에 비하면 한국의 부패는 양반이었다. 1950년대에 이미 초등교육이 보편화하는 등 국민의 감시 능력이 향상된 것이 중요했다. 양심적 학생과 지식인, 시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절름발이 민주주의 속에서도 언론자유가 숨 쉴 공간이 만들어졌고 덕분에 어느 정도의 권력 견제가 그나마 작동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도 극단적 부패가 경제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에서는 경제성장이 민주주의와 짝을 이뤄 발전했다고 학생들에게 설명한다. 그런데도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시 달성이라는 이 건조한 텍스트가 학생들에게 어떤 감흥이라도 주기나 할까? 박물관 방문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여주기로 했다. 산업화를 상징하는 영화로 ‘국제시장’을, 민주화를 상징하는 영화로 ‘변호인’을 골랐다. 어스름 해가 질 무렵 모여 피자를 나눠 먹으며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간략히 설명했다. 처음에는 영어 자막만으로 학생들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강의실에 불이 켜진 다음에도 감동은 쉬 가시지 않는다. 함께 박수 치고 눈물 훔치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나에게 질문을 쏟아낸다. 감동은 영화가 가진 드라마적 요소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산업화든 민주화든 결국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힘들여 일궈낸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업화’ ‘민주화’라는 건조하고 앙상한 텍스트 뒤에 많은 사람의 눈물과 피와 땀, 그리고 한숨과 고단함이 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나는 한 학기 강의 중 이 시간이 가장 기다려진다. 두번째 학기부터는 영화 시작 전 강의실 여기저기에 아예 티슈를 가져다 놓았다.
태어날 때부터 선진국에서 자란 우리 젊은 세대도 우리 현대사를 텍스트로만 배우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이 그들의 발길을 끌었던 이유도 앞의 외국 학생들 경우와 같다. 건조한 텍스트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모습을 복원했기 때문이다. 고속 압축성장 속에서 절대빈곤과 독재정치의 고단함을 이겨낸 세대들이 우리 곁에 그대로 생존해 있다. 빈곤과 전쟁과 기아를 겪은 세대가 있고, 고문과 납치와 이념 과잉을 겪은 세대가 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힘든 시절과 상처를 다른 세대에게 쉽게 말하지 않는다. 잊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공감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흔히들 역사는 시간이 충분히 지난 다음 평가해야 한다고 한다. 장기적 시각에서의 평가는 단기적 판단과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사 평가를 삼가야 하는 더 큰 이유는, 국민 분열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대의 고유한 경험은 때로는 그 자신의 삶 전체와도 같다. 그래서 한 시대를 섣불리 규정하는 것은 누군가의 삶 전체를 부정하거나 모멸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은 정치적 목적으로 동시대 역사를 평가하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의 평가는 균형감과 객관성을 갖기 어렵다. 목적에 따라 과장하기도 감추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이 누구의 과거를 폄훼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강화한다면, 그것은 분열이고 퇴행이다. 국가의 미래를 만드는 데 어떠한 긍정적 기여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가진 경멸적 뉘앙스가 민주화 노력 전체에 대한 폄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역사는 텍스트처럼 그렇게 앙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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