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철 지난 외국賞에 안녕을

유진우 기자 2024. 2.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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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외국에서 한국인, 한국기업이 상(賞)을 받으면 전 국민이 기뻐하던 시기가 있었다. 세계 최고라 자부할 만한 기술이 부족하던 때였다. 개인에게 입상은 곧 출세로 이어졌다. 기업에는 인지도를 높일 기회였다. 상장(賞狀)은 수출로 이어지는 큰 무기였다.

지금은 다르다.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권으로 불어났다. 세계를 선도하는 최신 기술이 우리 기업 손에서 나온다. 한국산(産)은 그 자체로 존재감을 뽐낸다. 기업도 개인도 더는 전처럼 사소한 수상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로지 일부 정부기관만이 철 지난 외국상을 연모한다. 한국식품산업클러스터진흥원, 줄여서 식품진흥원은 지난 주 국제식품품평회에 참가할 기업을 모집했다.

식품진흥원은 농림축산식품부 소관 기타공공기관이다. 이름처럼 우리나라 식품 산업 지원 최고위에 서있다. 1년에 쓰는 돈은 700억원 정도다.

이 기관은 올해 ‘몽드 셀렉션(Monde Selection)’과 ‘ITI(international taste institute)’에 제품을 출품할 기업을 선별해, 각 기업마다 2개 제품 총 150만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몽드셀렉션과 ITI는 둘 다 사설 영리기관에서 운영하는 식품 품평회다. 몽드셀렉션은 IIQS, ITI는 ITQI라는 기관에서 매년 주최한다.

두 기관은 전 세계 업체들로부터 출품작을 받아 평가를 해주고, 참가비를 받아 이윤을 챙긴다. 참가비는 출품작 1개당 1150~1650유로(최대 약 240만원)다. 심사진은 공개하지 않는다. 두 기관 모두 ‘엄선한 셰프와 소믈리에들이 한다’며 ‘리스트는 공정성에 의거해 밝힐 수 없다’고 강조한다.

2010년대까지 두 기관은 수상 결과와 출품작 통계를 대외적으로 공표했다. 어느 국가에서, 어떤 기업이, 무슨 제품을 출품했고 얼마나 많은 경쟁 상대와 겨뤄 얼마나 높은 등급 상을 받았는지 밝혔다.

몽드셀렉션이 수상 내역을 공개했던 2014년을 보면 출품작 3163개 가운데 2798개가 상을 받았다. 전체 수상작 중 88%가 수상했다.

이 기관은 평가 결과에 따라 그랜드골드·골드·실버·브론즈 상을 수여한다. 결과를 보면 출품작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389개는 금상을 받았다. 은상은 787개, 동상은 222개였다. 가치가 높은 상일 수록 더 수상자가 많은 기묘한 구조다.

수상작을 보면 2798개 가운데 80%에 달하는 2221개가 아시아 기업 제품이었다. 수상업체로 봐도 1008곳 가운데 808곳이 아시아 주류·식음료 업체였다. 2015년에는 일본 후쿠시마(福島)시 정부가 방사능 의구심을 지우기 위해 출품한 ‘후쿠시마 수돗물’도 상을 받았다.

ITI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곳은 몽드셀렉션보다 40년 늦게 나온 후발주자다. 두 기관은 투명성 확보 차원에서 밝혔던 수상작 통계가 논란을 빚자, 2010년 후반부터 관련 정보 제공을 멈췄다.

한때 출품에 열을 올렸던 국내 기업들은 이 무렵부터 등을 돌렸다. 대신 월드비어어워즈(WBA), 디캔터월드와인어워즈처럼 더 전문화한 품평회를 찾아 떠났다.

여전히 몽드셀렉션 홈페이지는 수상이 ‘효과적인 선전 수단(effective marketing tool)‘이고 ‘제품 판매량을 올려준다(boost your sales)’고 말한다. ITI는 가장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기업 형편과 출품작 수에 따라 출품비 조절이 가능하다’며 ‘가격을 협상하세요’라고 적었다.

상은 뛰어난 결과에 주어진다. 많이 받을수록 의미가 옅어진다. 열에 아홉이 받는다면 이름 난 외국상일지라도 인정받기 어렵다.

식품 정책을 펼치는 기관이라면 이런 미사여구에 넘어갈 필요가 없다. 수상 그 자체보다 어디서 주는 어떤 상을 받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기준이 불분명한 상패로 현혹하기 보다 차라리 소비자 혀에 맡기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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