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가난한 집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든다

천현우 작가·前용접 근로자 2024. 2. 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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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가난했다. 부끄러워한 적은 없다. 당당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차라리 드러내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가난 커밍아웃’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중·고등학교 땐 수학여행비를 대신 내주는 선생님이 계셨고, 대학교 교수님은 산업기능요원 업체를 추천해 주셨다. 막노동 다닐 때도 십장이 벌이가 괜찮은 일감을 먼저 찔러주었다. 내 삶이 곧 가난의 역사였던지라 주변에 처지가 비슷한 친구도 많았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가난을 고백하기 두려워했고 숨기려 무던히 애썼다. 가짜 명품을 두르고 다니는 친구, 무리해서 중고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친구, 휴대폰을 늘 최신형으로 들고 다니는 친구까지, 모두가 가난을 발각당하지 않으려 힘겨운 잔업과 철야를 기꺼이 견뎌냈다. 왜 겉치레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느냐 물으면 비슷한 답변이 돌아왔다. 없어 보이면 안 되니까. 이십 대 초반엔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몰랐다.

시간은 흘러 우리 모두 서른 중반이 되었다. 부족하나마 인생 경험이 쌓였고 자기 생각과 현실이 어긋났던 데이터가 축적됐다. 친구들은 ‘없어 보이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 실제 가난 탈출에 별 도움이 안 되며 행복과 멀어질 뿐임을 깨달았다. 나 또한 ‘없음을 숨기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 무례해 보일 수 있으며, 이 탓에 알게 모르게 기회를 많이 날려버렸음을 알았다. 시행착오의 시간은 무용하지 않아서 각자 좀 더 엄밀한 언어로 대화할 수 있게 됐다. 술자리에서 한 친구에게 좀 더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가난을 숨기려 했냐고.

친구는 가난을 두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실제 가난 혐오는 정말 온갖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가난을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기초생활수급자는 외식하면 안 된다는 사람, 당사자들의 언어가 보편 감수성이 떨어져서 불편하다는 사람, 심지어 가난을 도둑맞았다며 야유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말들이 친구에게 가난이란 온갖 공격의 구실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없어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던 이유는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보통 일찍 철이 든다고 한다. 실제로 평균보다 빨리 어른스러움의 외피를 두른다. 성숙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의식을 짓뭉개 자신을 감추는 법을 습득한다는 뜻이다. 가난이 공격거리가 된다면 재빨리 태도를 바꿀 뿐이다.

자의식을 잘 눌러왔던 탓에 사회생활은 잘했지만 부작용 또한 혹독했다. 친구는 번듯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었지만 정작 속은 곯아가고 있었다. 자기를 돌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요즘 삶이 허무하다는 넋두리에 문득 모두가 가난했던 산업화 세대 어른들이 떠올랐다. 국가 부흥의 깃발 아래 자아를 죽여 가며 뼈가 빠지도록 일한 선배들. 그 결과는 정년 퇴임 후 온갖 직업병에 시달리는 개인과 OECD 노인 빈곤율 1위 국가만 남았다. 누구에게나 박수 받을 만큼 훌륭하게 살았건만 정작 개인은 행복하지 않았다.

술자리 파할 무렵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며, 세상이 가난을 있는 그대로 봐주길 바랐다. 가난은 아주 흔해서 태어나서부터 겪는 이도 있고,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이도 많으며,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현상일 뿐이다.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며 꼭꼭 숨겨야 할 이유도 없다. 단지 불운했을 뿐인 이들을 향한 편견이 빈자를 더 불행하게 한다. ‘가난다움’을 강요하지 않는 세상을 소망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말이 쌓여 당사자들한테 상처를 입힌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한을 친구 말로 갈음하겠다. “없이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왜 훈수까지 들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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