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蘇는 한반도의 38선으로 일본 제국을 분할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전개된 미·일 전쟁은 이상한 전쟁이었다.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 개전 때와 달리 일본군은 승전에 대한 확신 없이 개전했다. 미국에서 유학했던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하와이 공습을 성공시킨 후 의심했다.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
일본은 중화민국을 지원하던 미국과 영국의 기세를 제압한 후, 유리하게 평화협정을 체결할 생각이었다. 1942년 2월 잠수함을 보내 캘리포니아 해안을 포격했지만 본토 상륙작전은 없었다. 4개월 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4척 등을 잃으며 대패했다.
이후 일본군은 계속 밀렸다. 승전에 기반한 평화협상이 불가능해지자 패전에 대비한 외교가 시작되었다. 일본이 패전 외교로 시간을 끌지 않고 좀 더 일찍 항복했다면 한반도는 소련 참전 이전에 해방되어 분단을 피할 수 있었다.
“덴노(天皇)와 한반도는 포기 불가”
이기기 위한 승전 외교 이상으로 힘든 것이 패전 외교다. 난파선의 선원들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승객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 일본 제국의 외교관들은 최대한 유리하게 지려고 했다.
일본에 가장 유리했던 종전 방식은 교전선(交戰線)에 따른 공간 분할(uti possidetis) 방식이었다. 이 방식에 따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일본은 동남아시아, 대만, 한반도, 만주 등을 계속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침략전쟁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스팀슨 독트린과 충돌했다.
다음으로 일본에 유리했던 것은 전쟁 이전 상태 회복(status quo ante bellum) 방식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전쟁 이전 시점을 어디로 보느냐가 중요했다. 1941년 12월 미·일 전쟁 개전 이전인가? 아니면 1937년 중일전쟁, 또는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전인가? 1931년 이전 상태, 즉 베르사유 평화체제로의 회복을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일본은 대만과 한반도에 더해서 서태평양 일대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와 처칠은 이미 1943년 1월 카사블랑카에서 “무조건 항복” 원칙을 천명해놓았다. 미국, 영국, 그리고 중화민국(현재의 대만)은 1943년 12월 카이로에 이어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전쟁 책임에 따른 징벌적 재조정 방식으로 공간을 재획정했다. 일제는 마지막까지 천황제 폐지나 히로히토의 퇴위, 그리고 한반도 해방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일본 항복은 소련군 참전 덕분?
1945년 8월 15일 항복에 반대하는 일본군의 궁정 반란을 뚫고 히로히토의 녹음 연설이 방송되었다. 그의 항복 결정에는 히로시마(8.6)와 나가사키(8.9) 원폭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최근 미국의 원폭보다 유럽에서 독일군을 꺾은 소련군의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중립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의 중재를 통한 평화교섭이 불가능해지면서 항복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소련 참전의 영향을 강조하는 주장은 일본이 불필요하게 원폭 피해자가 되었다고 보는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도쿄 전범재판 당시부터 미국이 지정한 미군 변호사는 일본의 전범들을 변호하면서 미국의 원폭 결정을 물고 늘어졌었다.
1959년에 만들어진 “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프랑스-일본 합작 영화는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미국의 원폭에 대한 적개심을 널리 확산시켰다. 독일군과 동거했던 프랑스 여인이 종전 후 프랑스인들에게 머리를 깎이는 등의 수모를 당한 것과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오버랩시킨 영화였다. 피해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원폭에 대한 공포는 이후에도 여러 영화들의 흥행을 촉진하며 미국의 가해와 일본의 피해를 부각시켜왔다.
원폭으로 전쟁을 끝낸 이유
소련군의 참전이 일제의 항복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8월 9일 소련군의 참전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이후의 일이었다. 히로히토의 항복 결정은 제3의 원폭이 도쿄 황궁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와 무관하지 않았다. 반인반신처럼 조작된 덴노의 이름으로 전쟁이 수행되었던 것처럼 종전에서도 히로히토의 결정이 필요했다. 당시 미국은 2개의 원폭밖에 없었지만 그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1945년 6월에 끝난 오키나와 전투는 미국의 원폭 사용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군 약 8만 명 이외에도 오키나와 주민 약 8만 명이 일본군의 결사작전에 희생되었다. 미군도 태평양 지역 단일 전투 최대 전사자(약 1만2000명)를 기록했다.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 미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면 훨씬 더 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원폭 이후 한반도 해방과 삼팔선
“(한반도) 해방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도둑같이 왔다.” 당대를 살았던 ‘씨알 사상가’ 함석헌의 회고다. “전쟁이 몇 해만 더 계속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해방을 다시 도둑질당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경고였다.
대한민국 임정 주석 김구에게 일본의 항복 소식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미국 육군성과 긴밀한 합작을 이루었는데 한 번도 실시하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한 것이다. 이제껏 해온 노력이 아깝고 앞일이 걱정이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자 8월 15일 이전에는 참전하기 어렵다던 소련은 8월 9일 만주에서부터 경성(서울)을 향해 빠르게 진격했다.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미국은 소련에 북위 38도선으로 작전구획을 나눌 것을 제안했다. 38도선 이남에 서울, 그리고 일본군이 만든 미군과 영연방군 포로수용소가 있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랴오닝(遼寧)반도 남단의 다롄(大連)과 평양 남쪽을 확보할 수 있는 북위 39도선도 고려되었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러일전쟁 때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던 다롄을 소련이 양보할 리 없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정책 결정자들이 삼팔선을 그어 분할 점령하려고 했던 것은 한국이 아니라 항복 이전의 일본제국이었다.
공간은 나뉘었지만... 시간과 인간은 쉽게 나뉘지 않는다.
한반도 분단은 임정 주석 김구의 탄식처럼 한민족이 해방의 주역이 되지 못했던 데 큰 원인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대한민국 임정이 국제적으로 승인되고 한반도 해방 작전의 주역이 되었다면 삼팔선은 미군과 소련군의 작전분계선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군과 미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한인들의 수는 일본군으로 참전한 조선인들에 비해서도 턱없이 적었다.
종전 이후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은 이승만이나 김구의 귀국보다 빠르게 원산에 상륙했다(1945.9.19.). 김일성을 원산까지 수송한 소련 선박도 사실은 미제(美製)였다. 그 배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용으로 대량 생산한 2700여 척의 리버티 선박들 중 한 척으로 1943년 미국이 소련에 원조한 것이었다.
한반도에 들어온 김일성은 자신을 “조국 해방전쟁”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미화된 김일성은 흑백투표함 선거 등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 1945년 일제에 맞선 “조국 해방전쟁”에 참전한 적이 없던 김일성은 1950년 미제에 맞선 “조국 해방전쟁”이라며 6·25전쟁을 일으켰다. 배후에는 1949년 미국의 원폭을 복제한 스탈린과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이 있었다. 이후 3년 이상의 전쟁을 통해 삼팔선은 군사분계선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위성사진이 보여주는 군사분계선 이남과 이북의 차이는 확연하다. 이 선을 국경선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남북 양쪽에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자칫 북한 지역도 과거 간도처럼 상실 될 수 있다. 군사분계선 이남만의 평화와 발전도 일장춘몽에 그칠 것이다. 약 80년간 공간이 나뉘었다고 해서 수천 년 한반도의 시간(역사)과 인간(민족)이 쉽게 나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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