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AI가 연필 깎는 맛을 알까
손으로 연필 깎는 느낌을 좋아한다. 칼로 연한 나무를 벗겨내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진다. 베스트셀러 일본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는 무라이 설계사무소 사람들이 여름 별장에서 창문을 열어 둔 채로 아침마다 그날 쓸 연필을 깎는 모습이 나온다. 싱그러운 숲의 공기와 새소리가 창을 통해 흘러들고,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 사이로 나무와 흑연의 냄새가 섞이며 서서히 감각이 깨어난다.
연필 깎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실제로 일할 때는 컴퓨터를 주로 쓴다. 미술 영역에서도 컴퓨터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다. 명령어에 따라 디지털 그림을 뽑아내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학습해 붓질하는 AI(인공지능) 화가까지 등장했다. 인간 화가와 AI가 협업한 작품도 이미 나왔다. 최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전시 중인 터키 작가 레픽 아나돌은 본인이 개발한 생성형 AI 모델에게 방대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스스로 학습한 AI는 추상적 형태와 색깔을 임의로 섞어 몽환적 이미지를 생성해낸다.
인간의 손을 쓰지 않고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에 연필 깎는 사람들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신체 감각에 집중하며 단순한 상태에 이를 때, 내면 깊은 곳에 닿을 수 있다. 세계적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통하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느리게 걷거나 글씨를 쓰는 등 신체 감각에 집중하며 내면을 텅 비우는 워크숍을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마음의 ‘집’인 몸을 ‘청소’하는 행위다. 아무리 AI가 발달해도 인간은 이런 근원적이고 단순한 경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타인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되찾아야 한다.
지금도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가끔 내 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잠깐의 틈을 내어 몸을 움직인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연필을 깎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마음이 선명해진다. AI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더라도 내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작은 확신이 거기에 있다.
※2월 일사일언은 김지연씨를 포함해 조규익 숭실대 명예교수·(사)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장, 임희윤 음악평론가, 박웅진 한국콘텐츠진흥원 태국비즈니스센터장, 정연주 푸드 에디터가 번갈아 집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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