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에겐 메이지 유신 발상지…韓에겐 치욕사가 싹튼 현장
# 日 근대화의 시작
- 쇄국 지향한 조선과 달리
- 서양 군사장비 연구에다
- 명륜관 세워 영어 교육
- 그때 공부한 하급 무사
- 메이지 유신 이끈 주역
# 조선통신사 흔적도
-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 조선에 대한 지배권 확보
- 한일 양국 우호관계 징표
- 조선통신사 상륙비 눈길
일본 규슈 최북단 후쿠오카현에서 간몬대교를 살짝 건너면 혼슈의 서쪽 끝 야마구치현에 닿는다. 에도시대 땐 조슈번으로 불린 야마구치에는 메이지유신의 발상지로, 일본의 근대화 성립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가 남아 있다. 한반도와 역사적 연관이 있는 곳도 빼놓을 수 없다. 삼면이 바다라 빼어난 풍광은 덤이다.
▮영어 과학 가르친 명륜관 vs 사서오경에 빠진 명륜당
에도시대 말기인 1853년 미 페리 제독의 검은 군함 4척이 에도만(도쿄만)에 나타난 후 이듬해 또 모습을 드러내자 에도 막부는 미국과 개항에 합의한다. 이후 1858년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5개국과 굴욕적인 통상 조약을 맺는다. 하지만 개항 이후 금은과 원료 등이 대량 유출되면서 경제적 대혼란이 발생하자 개항 정책을 비판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천황을 받들어 외국을 배척함) 운동이 들끓는다. 급진 양이론자들의 폭력적 행동이 잇따르자 에도 막부는 결국 1863년 6월 개항장을 폐쇄하는 양이 정책을 발표한다.
당시 조슈번은 존왕양이 운동의 거점이었다. 조슈번이 지금의 시모노세키항에 함포를 배치해 규슈와 혼슈 사이의 간몬해협을 봉쇄하자 1864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연합 함대를 구성해 초반에 박살낸다. 이른바 시모노세키 전쟁이다. 패전 후 조슈번은 서양의 군사 장비 연구에 돌입한다. 서양 오랑캐 타도 대신 서양을 배우며 부국강병에 집중한 것이었다. 불과 2년 뒤 프랑스가 강화도에 함포를 쏘며 개항을 요구하자 척화비를 세우며 더욱더 쇄국의 길로 나아간 조선과 달리.
조슈번 개화의 주역은 서양의 신지식을 가르친 공립 교육기관 명륜관의 젊은 하급 무사들이었다. 명륜관은 관부연락선(현 부관페리) 시종점인 시모노세키에서 차로 한 시간 걸리는 동해 쪽 해안가 소도시 하기에 있다. 조선의 서원이나 향교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싶다.
1719년 설립, 1849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일본풍 2층 규모의 전형적인 학교 건물이다.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 명륜당이 파벌에 따라 동재 서재로 나눠 기숙하며 사서오경 경전을 진리인 양 떠받들었다면 하기의 명륜관은 영어와 과학 세계지리 의학 등을 가르쳤다. 영국인과 스위스인을 초청해 공학도 가르쳤다. 실제 명륜관의 1, 2층 전시관을 둘러보면 당시 사용했던 총과 대포, 측량 도구, 수술 및 해부 도구 등이 전시돼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유신이 이끌었다. 메이지유신은 하급 무사들이 일으킨 정변이다. 그 주역이 바로 명륜관에서 공부한 조슈번의 젊은 하급 무사들이었다. 2006년 이들을 다룬 영화 ‘조슈 파이브’가 개봉하면서 그 제목이 그들의 별칭이 됐다. 명륜관 2층 복도에는 흑백사진 속 인물 5명을 실제 사람 크기의 판넬로 세워 놓았다.
‘조슈 파이브’는 명륜관에서 부국강병을 통해 조국을 일신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영국으로 밀항했다. 20대 초중반 5명의 젊은 무사는 영국에서 역할 분담을 해 광산 철강 전신, 화폐 제조, 철도 건설 등을 각각 배워 일본 공업의 선구자가 됐다. 도쿄공대도 명륜관에서 시작한 공부학교(工部學敎)가 출발점일 정도로 일본의 산업화 공업화에 크게 기여했다.
명륜관이 일찍부터 공학에 집중한 배경에는 요시다 쇼인이라는 스승이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 요시다는 고향 하기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서당 같은 학당을 세웠다. 조그만 누옥의 다다미 강의실에서 9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명륜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조슈 파이브도 이곳에 적을 두고 배웠다. 하급 무사 출신이었던 요시다는 서양을 소개한 중국 책을 섭렵하며 에도 등 일본 전역을 둘러보고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선 우물 안에서 벗어나 빨리 서양 문물을 배우라고 독려했다.
에도시대 젊은 하급 무사들에게 서양의 신지식을 가르쳐 이후 메이지유신의 발상지가 된 명륜관 전경.
▮한반도에 아픈 역사의 현장
야마구치현의 해상 관문이자 최대 도시 시모노세끼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895년 강화회의(시모노세끼조약)를 연, 우리에겐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의 리홍장이 대표로 참석한 이 강화회의 체결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확보했다.
부산의 자매도시인 시모노세끼는 이곳에서 세토 내해를 거쳐 오사카, 도쿄로 이어지는 요충지여서 고대에는 견당사, 조선시대 땐 통신사가 첫 발을 내디뎠고, 에도시대 땐 서양 군함들이 자주 오가던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다.
간몬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청일 강화 기념관이 특히 주목을 받는 건 당시 회의장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놓았다는 점이다. 당시 사용된 화려한 의자와 램프, 프랑스산 난로, 잉크병 등이 그것이다. 특히 옻칠과 금가루로 도금한 붉은빛 의자는 도쿄 황실의 별궁 히마리큐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하다. 당시 회의장인 ��판로는 요정 겸 세모노세키 특산물인 복어요리 전문점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단골집이었다.
회의장 옆 이토 히로부미 흉상 옆으로 열린 길을 따라가면 붉은색의 아카마 신궁이 나온다. 백제계인 6살의 어린 안토쿠 천황이 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되자 외할머니가 손주를 껴안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전해온다. 이 신궁은 후에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객관으로 사용됐다.
청일 강화 기념관에서 도로를 건너면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가 있다. 이를 증명하듯 바로 옆 해안가에 대형 닻이 전시돼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후 조선과 우호적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조선은 조선통신사 사절단이 도쿄로 가는 도중 시모노세끼에 11번 들렀다. ‘조선통신사 상륙 엄류의 땅’이라 적힌 커다란 비석은 2001년 8월 세워졌고, 비문은 당시 한일의원연맹 회장이던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썼다. 비석 제막식에는 시모노세키가 지역구인 당시 중의원이던 고 아베 신조 총리도 참석했다.
◆ 주변 관광지
- 광고 촬영지 유명세 떨친 츠노시마 대교
- 일본 최초 서양식 등대도
삼면이 바다인 야마구치현은 자연경관이 빼어나 발길 닿는 곳이 명승지요 관광지다.
우선 츠노시마 대교. 육지와 츠노시마 섬을 잇는 다리로,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이다. 2000년 11월 준공한 1780m의 이 다리는 도요타 렉서스 자동차 광고 촬영지로 유명해져 이후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촬영지로 손꼽힌다.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모습은 한 폭의 거대한 수채화다. 풍광이 워낙 빼어나다 보니 좌측에 별도의 전망대가 있다. 다리 우측 주차장 쪽에서 보는 모습도 이에 못지 않다. 두 곳 모두 측면이다. 발품을 팔아 바로 뒤 언덕 쪽으로 오르면 더욱더 환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가면 수선화가 만개한 등대공원을 만난다. 문화재인 이 등대는 동해 쪽에 면한, 1876년 첫 불을 밝힌 일본 최초의 서양식 등대이다. 117계단 중 105계단은 나선형, 마지막 12계단은 80도 급경사 계단이다. 땀 흘린 만큼 탁 트인 풍광에 가슴이 뻥 뚫린다.
츠노시마에서 30분쯤 동해 쪽 해안도로를 달리면 모토노스미 신사. 일본에선 다산과 번영의 상징인 하얀 여우를 모신 곳이다. CNN이 선정한 ‘일본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 31곳’ 중 한 곳이다. 바닷가에 접해 있어 기장 해동용궁사를 떠오르게 한다. 빨간색의 도리이 123개가 경사지를 따라 100m쯤 이어져 터널 같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청록색 파도와 빨간색 도리이, 그리고 수목의 초록이 대조를 보여 멀리서 보면 장관이다. 해안 쪽 절벽 바위에 파도가 부딪히면서 생기는 회오리 바람 같은 물줄기도 인상적이다.
내륙에선 일본 최대 규모(4520㏊)의 카르스트 대지인 아키요시다이도 빠뜨리지 말자.석회암이 곳곳에 양떼처럼 지표면에 드러나 있다. 고생대 때 바다의 산호초가 오랜 세월에 거쳐 석회암으로 굳어 융기작용에 의해 형성됐다. 바로 옆에 석회동굴도 있다. 총길이는 11㎞ 이며 1㎞ 정도 개방한다. 각양각색의 종유석과 석순이 어스름한 조명을 받아 몽환적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국가 특별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울진 성류굴, 단양 고수동굴 등 국내 석회암 동굴보다 규모면에선 한 수 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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