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대한민국 위기, 이미 잃어버린 20년을 지나고 있다
대한민국이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졌다. 출산율은 전 세계에서 가장 낮다. 기업과 가계부채는 물론 연금부채를 포함한 정부부채도 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산업 경쟁력은 점점 약해진다. 반도체는 메모리 편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동차는 중국이란 가성비가 높은 새 경쟁상대를 만났다.
지난 20여년 동안 경고는 수없이 많았다. 2007년 '샌드위치론', 2013년 '삶은개구리론'이 회자했다. 역대 정부마다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렇다고 나아진 것은 없다. 2000년 5.8%던 잠재성장률은 계속 낮아져 이제 2%를 밑돈다.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했지만 출산율은 국가소멸을 걱정하는 수준이 됐다.
왜 이렇게 됐을까. 국가전략 추진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민주화의 역설이 있다. 5년마다 대선을 치르고 나면 집권세력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들은 나라를 다시 세울 기세로 모든 걸 바꾸려 했다. 제대로 논의조차 안 된 공약을 국민과 약속이라며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며 다른 의견을 내면 적폐세력으로 낙인찍었다.
공무원에 대한 처벌은 점점 가혹해졌다. 승진을 막는 행정적 징계를 넘어 연금까지 박탈하는 형사처벌까지 한다. 그 정점에는 형법의 직권남용이 있다. 이로 인해 돈 안 받고 승진을 포기하면 국민을 위해 소신껏 봉사할 수 있다는 그간 공무원사회의 불문율이 깨졌다.
그렇다고 공무원들이 모두 어려워진 것은 아니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정책을 마치 큰 변화가 있을 것처럼 언론에 홍보하는 능력을 갖춘 공무원은 승승장구한다. 제대로 일을 하려면 힘들지만 일 욕심을 버리면 편하게 살 수 있다.
어차피 일은 공무원이 아니라 산하 공공기관이 한다. 2012년 288곳이던 공공기관은 10년 사이 350곳으로 21.5% 늘었다. 산하기관은 공무원에게 소중한 존재다.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정답을 찾기 어려운 윗선의 지시를 토스만 하면 된다. 퇴직 후 재취업의 기회도 제공한다. 정치권 낙하산에 대한 견제는 심하지만 공무원은 상관없다. 산하기관 취업을 제한하는 공직자윤리법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나빠지는 경제지표보다 더 큰 위험은 개혁수요와 의지가 소멸한다는 점이다. 5년 전 화학물질 안전규제의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가 언론을 도배했다. 지금은 조용하다. 규제가 개선됐기 때문이 아니다. 업종을 전환하거나 적응하지 못한 기업은 사라졌다. 겨우 살아남은 기업도 규제부담이 큰 사업은 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도를 마음껏 허용한다던 규제샌드박스도 비슷한 상황이다. 더는 규제블랙홀이라는 비판이 나오지 않는다. 개선됐기 때문이 아니다. 규제개혁을 요구한 스타트업은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될 만한 스타트업은 아예 본사를 해외로 옮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한국은 잃어버린 20년을 지나고 있다. 일본처럼 버블붕괴를 기준으로 하면 이제 시작이다. 하지만 전략을 가지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꾸준히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 시스템은 이미 20년 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단지 중국이란 거대한 특수를 만나 체감이 늦어졌을 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난국을 풀어야 할까. 민주화에 답이 있다. 그렇다고 다수결은 아니다. 정책의 민주화는 집단지성을 의미한다. 정책은 과학이다. 많은 사람이 오답을 선택했다고 오답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누구의 제안인지가 아니라 어떤 논리인지를 봐야 한다. 무엇보다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발표된 저출산 공약을 보면 걱정스럽다. 육아휴직 의무화나 현금지원 확대는 새로운 정책이 아니다. 이미 육아휴직제가 있고 현금지원도 한다. 조금 더 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재정부담이 커지고 기업 경쟁력만 떨어뜨린다. 급하다고 막 하면 더 위험하다. 기존 정책이 왜 작동하지 않는지 그 원인부터 확인해야 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잃어버린 30년을 맞게 될지 모른다.
곽노성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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