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강’ 피트 위스키...옥토모어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최종 목적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갈 것이고 세계관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안 하면 그 누구도 하지 못할 것이다.”
스타십 엔터프라이즈호의 커크 선장이 외계 행성 탐험을 앞두고 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는 스코틀랜드 아일라섬, 브룩라디 증류소의 마스터 디스틸러 짐 매큐언(Jim McEwan)이 한 말입니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자국 보리만을 사용하는 브룩라디(Bruichladdich) 증류소
1881년에 설립된 브룩라디 증류소는 당시 아일라섬에서 가장 최신 설비를 갖춘 증류소였습니다. 아일라섬 주민 대부분은 농업과 위스키 산업에 종사하는데, 브룩라디는 농민들의 보리 사업을 장려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와 아일라섬 내 지역 보리만을 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 증류부터 숙성, 병입까지 모든 과정이 아일라섬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브룩라디 제품 중에 수통처럼 생긴 하늘색 위스키병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아일라섬 증류소에서 피트 처리를 하지 않은 자국 내 보리로만 만든 ‘더 클래식 라디(The Classic Laddie)’라는 제품입니다. 병 색깔은 화창한 아일라섬의 바다를 표현했다고 합니다. 브룩라디는 ‘해안가의 언덕’이란 뜻으로 와인처럼 테루아를 강조하는 증류소입니다. 테루아는 원래 토양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지만 포도가 자라는 토양이나 자연 조건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청정’ 논 피트 증류소에 짐 매큐언이라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렬한 피트 위스키가 탄생합니다.
피트 위스키를 탐닉하다 보면 점점 더 강한 피트를 찾게 됩니다. 그 여정의 끝은 아일라섬에 있습니다. 지난 화에서 다뤘던 ‘불타는 병원’ 맛이 특징인 라프로익과 캠프파이어에서 타다 남은 재맛의 라가불린을 떠올리셨다면 얼추 방향성은 맞습니다. 그런데 피트라고 다 똑같은 피트가 아닙니다. 밀폐된 화생방실에서 연막탄이 터지는 듯한 강한 향과 피트 분자들이 하나하나 입안에서 폭발하는 퍼포먼스를 내는 싱글몰트 위스키가 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옥토모어(Octomore)입니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 전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뼈째 회로 먹어도 좋고 연탄불에 구워 먹는 맛 또한 일품입니다. 고소함이 뭔지 온몸으로 보여주는 생선입니다. 옥토모어도 그렇습니다. 피트만 보면 손사래를 쳤던 사람들도 옥토모어 앞에서는 첨잔을 요구합니다. 간혹 누군가의 선약도 갑자기 사라지는 마법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렬한 맛처럼 병 모양도 독특하게 생겨서 어디를 가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매력을 가진 위스키입니다. 위스키 마니아인 배우 이청아는 옥토모어를 최애 위스키로 꼽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페놀 수치를 가진 위스키
옥토모어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300ppm에 육박하는 페놀 수치 때문입니다. 페놀 수치란, 백만분의 일에 함유된 피트의 양을 말하는데, 보통 페놀값이 높을수록 피트의 풍미가 강해집니다. 피트 위스키로 잘 알려진 라프로익이나 라가불린의 페놀 수치가 40ppm인 것을 감안하면, 옥토모어가 얼마나 ‘폭력적인’ 수치를 가졌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페놀값은 완성된 위스키에서 재는 것이 아니라, 피트로 건조를 마친 맥아의 수치를 측정한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수치가 절댓값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라프로익에서 40ppm으로 위스키를 만들었다는 것은 40ppm으로 처리된 피트 몰트를 썼다는 것이지 최종 페놀값이 40ppm이 아닙니다. 페놀값은 제조 과정에서 그 수치가 바뀝니다. 특히 피트 위스키는 숙성 기간이 길어질수록 페놀 수치가 낮아지고 피트의 성격도 온순해집니다. 고숙성 피트 위스키에서 피트가 약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즉 300ppm을 가진 옥토모어가 40ppm을 가진 라프로익보다 피트 맛이 7배 이상 강하게 느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기분은 그럴 수 있지만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피트 위스키는 숙성이 짧을수록 피트의 캐릭터가 잘 나타납니다. 옥토모어의 경우 숙성 기간을 5년으로 짧게 잡습니다. 그만큼 피트의 캐릭터가 강하게 느껴지고 스피릿의 고소함도 기분 좋게 다가옵니다. 라벨에 캐스크 스트렝스라는 별도의 표기는 없지만, 알코올 도수가 대부분 50%대 후반에 맞춰서 출시됩니다. 옥토모어가 물을 너무 많이 타서 밍밍하다는 이야기는 그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옥토모어의 첫 증류는 2002년 9월에 이루어졌고,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 후 2008년에 정식으로 출시됐습니다. 이듬해 출시된 옥토모어 오르페우스(Octomore Orpheus)는 보르도에서 공급한 프랑스산 유러피언 오크통에서 2차 숙성을 거친 후 병입됐습니다. 옥토모어가 최초로 와인 오크통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현재까지도 옥토모어 시리즈 중에 늘 와인 캐스크 제품 하나가 껴 있는 계기가 된 셈입니다. 한편 2012년에는 프랑스의 다국적 음료 그룹인 래미 쿠엥트로(Rémy Cointreau)에 매각되면서 옥토모어의 가장 고숙성 제품인 오르페우스 10년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매년 한정판으로 출시되는 옥토모어 제품들을 살펴보면 병에 고유의 숫자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첫 자리는 시리즈 번호이고, 소수점 뒤에 붙는 숫자는 오크통의 특성 등을 나타냅니다.
◇옥토모어 병에 표기된 숫자의 의미
옥토모어의 가장 기본이 되는 ‘.1’ 시리즈는 100% 스코틀랜드 보리를 사용하고 주로 미국산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됩니다. ‘.2’ 시리즈 역시 100% 스코틀랜드 보리로 증류하며 최종 숙성 단계에서 와인 오크통을 사용하는 게 특징입니다. 주로 아마로네(Amarone)나 소테른(Sauternes) 등을 사용하며 가장 실험적인 제품군입니다. 하지만 가끔 너무 실험적이어서 호불호가 갈리는 제품이기도 합니다. ‘.3’은 100% 아일라섬에서 재배한 보리만을 사용하며 주로 버번 오크통과 유러피언 오크통에서 숙성됩니다. 늘 가장 비싸고 눈 감고 매수해도 실패가 없는 시리즈로 알려져 있습니다. ‘.4’는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지만 주로 새 버진 오크통을 사용하는 편입니다.
이쯤 되면 대체 옥토모어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60%에 육박하는 높은 알코올 도수와 100대부터 시작되는 폭력적인 페놀 수치는 솔직히 조금 두렵습니다. 단순히 스펙만 보고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막상 잔에 코를 대면 향이 생각보다 순하고 곱상해서 놀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숙성 특유의 위스키에서 나타나는 코를 찌르는 알코올도 없고 맡을수록 고소한 보리 향에 놀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리즈마다 차이가 있지만, 기분 좋게 훈연된 고기향, 요오드와 과실향 등이 복합적으로 편안하게 코를 감싸는 느낌입니다. 위스키를 한 모금 물면 저숙성 위스키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복합적인 구조감이 느껴져 입안이 매우 즐겁습니다. 저숙성 위스키에 대한 모든 선입견이 깨질 것입니다.
정말 맛있는데 아무에게나 추천할 만한 위스키는 아닙니다. 그만큼 개성이 강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제품입니다. 하지만 피트 위스키에 관심이 있고, 높은 도수의 위스키를 즐긴다면 반드시 경험해봐야 할 관문입니다. 옥토모어를 안 마셔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마셔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보틀 구매가 부담스럽다면 가까운 몰트 바에서 하프 정도만 경험해 보시면 어떨까요? 깜짝 놀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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