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처럼 사라지는 필선…"장재민, 한국 회화계 새 바람"
유화→아크릴구아슈 '모호한 회화' 전시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 그림은 '갈망의 그림'이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어둡고, 거칠고, 못 그렸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모호함에 빠진다. 붓질이 스스로 살아나듯 화폭의 풍경들이 제 모습을 보였다 풀어지기를 반복한다.
어찌 보면 마무리가 덜 된 소극적인 자세로 그려진 그림인데 허공에 떠서 이동 되는 상태에 빠지게 한다.
작가는 "형상을 구축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감각을 잡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4년 만에 서울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장재민(39)의 작업이 확 달라졌다.
2020년 '부엉이 숲' 전시가 유화로 그려 물성과 부피가 강조되어 '뒤덮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면 이번 작품은 '아크릴릭 구아슈' 작업으로 가볍게 부유하는 허공의 감각을 극대화한다.
마치 '마술 같은 그림'이 된 건 그의 '모험 정신'이 충전했다. "재료를 바꾼다는 건, 화가에겐 큰 고통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외국어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 같은 것이죠."
이 과정 속에서 수많은 작업을 버려야 했다." 쉼 없이 그리며 관성이 되어버리는 것들, 결과적으로 나온 작업들을 바꾸기 위해서 스스로 인정하기보다 이를 계기로 모험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이런 측면에서 이번 작업은 매체를 찾은 것 같아 만족한다"고 했다. 2011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첫 개인전을 연 2014년 이후 10년만의 변화다.
풍경화를 그리지만 풍경화가 아니고 정물화지만 정물화가 아니다. "풍경을 접하고 사물을 마주하는 처음의 순수한 상태, 모든 것이 파악되지 않은 모호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그린다."
제주 '쇠소깍'을 그린 '깊은 웅덩이의 끝'이 보여준다. 필선들이 뒤엉켜 풍경인듯 아닌듯 모호함이 난무한다.
"장소와 기억, 그때 감정들이 쌓인 '시간의 중첩'에 중점을 뒀다"는 그는 "생성이 되고 있는 건지 사라지고 있는 건지 그런 부분들이 명확하지 않고 시작을 끝을 알 수 없게 모호하게 제시하고자 했다"며 작품을 독특하게 선보인다. 벽에 걸지 않고 비스듬히 세워 내려다보는 시점을 제공한다. "벽에 걸린 평행한 시간대가 아니라 어긋난 공간감을 줌으로써 상상의 공간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다.
'상상의 공간 창출'은 작가의 화두다. 대형 캔버스를 앞뒤로 붙여 천장에 매단 전시 연출력도 관객들에 확장된 상상을 유도하는 장치다. "화면 안에 있는 상태만 느끼는 게 아니라 화면에 담기지 않은 부분까지 상상하기를 바란다"며 "마치 부유하는 허공의 감각처럼 공중에 띄워서 앞뒤로 건 방식으로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눈앞에 성큼 다가온 대상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리할 것 인가를 확인하는 차원"이라고 했다. 저 멀리서 일어나는 일들, 저 먼 곳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누군가가 알 수 없는 일을 상상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그림을 나열하며 그 사이에서 또 누군가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식이다.
중력에 묶여진 모든 것을 초탈하게 만드는 그의 작품은 붓질이 흐르는 듯 유영한다.
흩어져서 사라지는 것 같은 공간의 구성, 시공간이 하나로 진공 상태 같은 그림은 유일한 취미인 밤 낚시에서 비롯됐다. "고요한 낚시터에 혼자 덩그러니 있다 보면 물리적인 땅이나 하늘의 개념이 사라집니다. 어둠 속에 잠겨서 일상과 다른 감각을 쓰게 하는 상태가 되는데…이런 건 뭘까?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런 감각들, 이걸 어떻게 그림에 담을 수 있을 것 인가를 생각하는 거죠."
"장재민에게 회화란 다중적인 시간과 감정의 교차점이다."
이진명 미술평론가는 "시공간을 특정할 수 없는 모호함에 에워싸이게 되는 장재민의 작품은 빠른 필치와 대담한 구성으로 현대회화의 문법을 깨고 있다"면서 "화면이 낱낱이 분리되어 공기로 사라지는 느낌을 준다든지 하는 작가의 회화 세계는 파격의 연속"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풍경화와 정물화에 인식론의 개념을 입혀서 역사적 연원이 깊은 두 장르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며 "현재 K아트의 현대 회화가 변화무쌍하게 진화하고 있는 가운데 장재민의 작품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의 그림으로 한국 회화계의 새로운 바람을 예고한다"고 호평했다.
이번 전시 제목은 라인 앤 스모크(Line and Smoke). '연기처럼 사라지는 필선'이라 생각해 작가가 명명했다는 장재민의 회화는 직접 봐야 느낀다. 무의식적 체험으로 나온 작품은 순수한 에너지의 파동을 전하며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도대체 무엇을 본다고 생각하는가. 전시는 3월2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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