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타워] “목숨 아닌 긴 인생을 걸고 씁니다”

김용출 2024. 1. 3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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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가족들 앞에서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는 언제나 뭔가를 쓰고 있었거든요. 삼십 년도 더 전에 386도 아닌 286 컴퓨터를 사서 혼자 단편소설을 써보고, 그 컴퓨터로 육아일기를 써서 나만의 책도 만들어보고, 마흔 살 나이에 만화 스토리를 써서 응모도 해보고, 인터넷에 판타지나 호러 소설도 써보고, 아무것도 안 쓰고 몇 년이 지나기도 하지만 결국 또다시 쓰기 시작하고, 아무 보상도 없이 그냥 혼자 쓰고 싶은 대로. 소설이 아니더라도 뭐가 됐건, 이야기를 만들어 글을 쓰는 것은 그냥 제 인생에 항상 있어 온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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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수상자의 담담한 소감, 강렬한 울림

“사실은,” 가족들 앞에서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글을 쓴다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고, 그런 낌새도 주지 않았다. 미루고, 또 미뤘다. 시상식이 임박하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행사를 사흘 앞둔 토요일, 그는 겨우 가족들에게 고백했다. “올해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어.”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오랜 고민 끝의 고백이었지만, 가족들에겐 갑작스러운 통보였을 터였다. 누군가는 당선 발표가 조금 전에 이뤄진 줄 알고 축하해 주었다. 통보를 받은 것은 이미 4주가 지난 뒤였고, 지면 발표 역시 벌써 2주가 지난 뒤였는데도. 여러 질문이 터져 나왔다. 유독 하나의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대체 언제 글을 쓰셨어요?”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언제 글을 썼지? 가족들이 궁금해할 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는 그에겐 정말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1월 초 부친상으로 한 해를 시작해, 큰 아이 혼사도 치렀으며, 집 이사도 했고, 그리고 12월 말에는 마지막 한 분 남아 계시던 고모님까지 돌아가셨으니까. 그렇게 지난해에 애들 엄마에서 친정어머니가 됐고, 무려 장모님이 되었으며, 집안의 가장 윗세대 어른이 됐으니까.

그래, 언제 내가 글을 썼을까. 문득 소설 수업에 가면 처음 만나는 문우들로부터 자주 듣던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글 쓴 지 얼마나 되셨어요? 맞아, 그때마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했던 자신의 모습도 함께.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소설 수업에 다닌 그였다. 나는 언제부터 글을 썼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는 언제나 뭔가를 쓰고 있었거든요. 삼십 년도 더 전에 386도 아닌 286 컴퓨터를 사서 혼자 단편소설을 써보고, 그 컴퓨터로 육아일기를 써서 나만의 책도 만들어보고, 마흔 살 나이에 만화 스토리를 써서 응모도 해보고, 인터넷에 판타지나 호러 소설도 써보고, 아무것도 안 쓰고 몇 년이 지나기도 하지만 결국 또다시 쓰기 시작하고, 아무 보상도 없이 그냥 혼자 쓰고 싶은 대로. 소설이 아니더라도 뭐가 됐건, 이야기를 만들어 글을 쓰는 것은 그냥 제 인생에 항상 있어 온 일입니다.”

올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된 유호민씨는 지난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대강당에서 열린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차분하고 담담한 그의 수상 소감을 듣고서야, “직장으로 학교로 가족들이 집을 비우면 또 하나의 나는 인터넷상의 유령 카페에서 혼자 글을 썼다”는 지면에 실린 당선 소감을 다시 읽고서야, 한때 인기 전문직 종사자이기도 했던 그가 오랜 시간 글쓰기의 세계 안에서 생활하고 즐거워하던 모습이 하나둘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상 소감 후반부에 이르자, 그는 갑자기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무명 가수의 사연을 꺼내는 게 아닌가. 항상 음악을 해왔다는 그 무명 가수가 한 말이 아직도 그의 마음에 남아 있다고. 요즘 분들 목숨 걸고 음악을 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목숨 걸고 하지 않고 인생 걸고 합니다,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길어요, 라는.

마침내 그의 이야기는 막바지로 내달렸다. “하지만 저, 하나뿐인 목숨 대신 긴 인생을 걸고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꿋꿋하게 계속 가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메시지는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목숨 대신 긴 인생을 걸고…. 어느새, 기자의 두 손이 모여 박수를 치고 있었다. 서서히 점점 세게.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꿋꿋하게 계속….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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