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현실 안주 땐 ‘日 침체’ 답습… ESG 대응 ‘위기를 기회로’ [창간35-대한민국 ESG 경영 리포트]

이도형 2024. 1. 3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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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 공시 규율 강화
美·유럽 ‘지속 가능 경영’ 무기화 나서
규제로만 인식 말고 탄소중립 나서야
선진국, 역내 기업 경쟁력 위해 추진
공시 의무화 지연에 준비 시간 벌어
정부 ‘맞춤형 특화 지원’ 등 정책 필요
탄소중립 달성 땐 2300조 경제 효과
2070년까지 GDP 年 2.2% 성장 전망

“중국의 부상이 우리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를 늦추고, 산업 구조가 더 높은 단계로 가야 할 시간을 늦췄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해 7월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제주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년간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이 필요했는데 ‘중국이 우리를 쫓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패러다임 전환에 나서지 않으며 안주했다”는 것이다. ‘안주’의 후폭풍은 혹독했다. 지난해 한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180억달러 적자를 기록해 1992년 수교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한국경제에 위기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10여년 전, 일본이 그러했다. 2012년 LG경영연구원은 일본을 대표하는 소니, 파나소닉, 샤프 등 주요 대기업들이 대규모 적자를 낸 이유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무엇보다 일본 기업들은 개량형 혁신을 추진하다 제품과 사업 진부화 흐름을 막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일본기업들이 1980년대까지는 선진국 모범사례를 따라잡는 추격자로 ‘혁신’ 효과를 높일 수 있었지만, 세계 정상급 기업으로 올라서자 혁신을 주도하는 데 미진했다는 것이다. 정보기술(IT) 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던 2010년대 일본 기업과 정부는 근본적 변화보다는 미시적 대응에 머물렀고 그 결과 후발주자인 삼성·LG 등 한국기업에 역전을 허용했다.

지금 한국경제의 ‘정체’는 10여년 전 일본경제의 정체와 유사하다. 경제계와 산업연구기관 소속 민간전문가 80여명으로 구성된 ‘산업대전환 포럼’은 지난해 9월 정부에 ‘6대 주제와 46개 과제’를 선정해 제출했다. 이들은 “우리 경제의 현 상태는 성장을 기대하기는커녕,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답습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며 “선진국 추격형, 중간재, 대중 수출 위주의 성장방식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다.

‘위기’는 ‘변화’의 추동력이다. 한국경제는 어떤 변화를 시작해야 할까. 먼저 선진국 경제로 진입한 미국과 유럽은 새 패러다임으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내세우고 있다. ‘지속 가능한 경영’을 앞세워 전 세계 시장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ESG를 통해 자국 기업을 보호할 뿐 아니라 중국·인도 등 신흥대국과의 패권경쟁에서의 ‘무기’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21세기 초 일본경제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지 못해 침체했다면, 지금 한국경제 앞에는 ‘ESG’라는 파도가 다가오고 있다. 이 파도를 단순히 재무적, 회계적 이슈로만 다뤄서는 안 되는 이유다.
◆‘ESG’ 파고, 주춤 속 대세는 계속

ESG 경영과 관련해 가장 앞서는 규제를 내놓는 곳은 유럽이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7월 독자적인 지속가능성공시기준(ESRS)을 채택했고 ESG 정보공개 제도인 CSRD(Corp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Directive) 이행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경영’을 추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타국 기업 대비 EU 산하 기업들에 유리한 조건을 구비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속내가 숨어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EU의 경우 역내 기업들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ESG를 추진하고 있음이 명확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ESG 추진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올해 상반기 상장기업의 온실가스 배출 및 기타 기후 문제 등 기후 공시 정보를 의무화하는 새로운 규정의 최종안을 도출할 예정이다.

강화된 ESG 규정에 대한 각국 기업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이를 조율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미국은 올해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가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기후변화에 부정적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이 현실화될 경우 관련 정책이 힘을 받을 가능성은 작아진다. EU도 당초 ESRS의 부분별 표준 채택을 올해 6월까지 마련할 예정이었으나 새로운 보고지침을 충족하기 어렵다는 기업들의 반발로 2년 미뤄진 상태다.

국내 ESG 공시가 당초 2025년 실시에서 미뤄진 것도 이러한 세계적 추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0월 ESG 공시 도입 시점을 2025년에서 2026년 이후로 연기하기로 했다. 국내 ESG 공시 주요참고 기준인 국제회계기준(IFRS)재단 산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의 ESG 공시기준이 지난해 6월에 들어서야 최종 확정됐고, 미국 등 주요국 ESG 공시 의무화가 지연된 점등을 고려한 판단이다. 금융위가 이 결정을 내리기 전, 한국경제인협회(한경연) 등은 명확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부재하다며 공시 시행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주춤하는 추세지만 ESG 관련 규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전문 기업인 딜로이트에 따르면, CSRD는 EU에 자회사를 두고 있는 기업까지 지속가능성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어 유럽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기업도 CSRD 지침에 따라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또한 캘리포니아주와 같이 미국 내 진보성향이 강한 지역이나 애플과 같은 기업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ESG 규제가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시간은 벌었지만… 정부 대책은?

금융위는 올해 1분기 중에 국내기업에 적용될 ESG 공시기준을 구체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한국거래소, 각 협회 등과 함께 ESG 공시기준 도입을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문제는 ESG와 관련해 기업 간 인식이 천차만별이고 이를 아우를 ‘통일된 기준’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수출 위주 대기업은 투자자나 소비자 요구에 맞춰 ESG 대응 노력을 적극적으로 경주하고 있는 반면, 대기업이라도 내수 위주 기업들이나 중·소 기업들은 ESG 대비가 아직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국내 ESG 전문가로 꼽히는 문철우 성균관대학교 글로벌경영학과 교수는 “ESG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철강 산업의 경우 포스코나 현대제철과 같은 글로벌 시장에 참여하는 대형 철강사들은 10년 이상 지속가능성 관련 준비를 하는 등 준비를 잘해오고 있지만, 대부분의 다른 철강사들은 준비가 취약한 경우가 많다”며 “기업 간 공시 대응 역량 차이는 자발적 의지라기보다는 외부압력에 대한 대응 필요도에 따라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백인규 딜로이트 ESG 센터장은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 중견기업의 경우 상대적으로 제한된 자금이나 인력문제 등으로 인해 현실성 있는 대응 노력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이 아닌 중견·중소기업에 ESG 공시는 ‘기회’보다는 ‘비용’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각자 처해있는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문 교수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은 △우선적인 ESG 산업 전략 및 비전 제시 △맞춤형 특화 지원정책 제공 △부처 간 조율을 통한 관련 부처의 입장 정리 △국내 상황과 맞지 않은 해외 ESG 공시 기준의 수정 △국내외 기업의 동등한 ESG 공시 요구 등이 필요하다고 정부에 제언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그 점에서 미진한 진척도를 보인다. 김진귀 삼정 KPMG 부대표는 “한국의 경우 ESG 정책의 큰 목적과 작동원리가 모호하다”며 “환경부의 ‘K택소노미’(한국형 녹색분류체계)나 금융위의 ‘ESG 공시’ 등 부서별로 성과 위주의 파편화된 정책들을 발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저탄소 전환 시 GDP 연평균 2.2% 성장”

반도체와 자동차 이후 뚜렷한 차세대 먹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한국경제에 ESG는 ‘위기’지만, 뒤집어 보면 ‘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2021년 딜로이트는 ‘한국경제의 터닝포인트’라는 보고서에서 현재 기후변화를 방치할 경우 한국 경제는 향후 50년간 935조원의 손실을 볼 것이라고 추산했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해 탄소중립을 달성할 경우 2300조원의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성공적인 탄소중립이 이뤄질 경우 2070년 한국경제엔 다국적 대기업이 하나 더 생길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효과다.

백 센터장은 “신속한 탈탄소화가 진행될 경우 모형분석상 기후대응 실패에 비해 2070년까지 한국의 GDP는 연평균 2.2%씩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며 “전환 초기에는 저탄소 기조로 전환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발생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면서 발생하는 편익이 비용을 능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한국경제가 ESG 관련 논의를 성과평가나 회계공시적 접근보다는 산업전략적 접근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문 교수는 “규제 마인드에서 산업경쟁력 중심으로 ESG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기업이 좋은 ESG 성과를 달성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없는 일”이라며 “다양한 분야의 재조정이 필요하고 이를 지원하는 산업 정책이 우선돼야 하는 등 장기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이도형·김범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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