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과 좀 어긋난 길 가는 이들에게 위로 건네고 싶었죠” [창간35-제20회 세계문학상]
글쓰기,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일
사찰서 일하며 2018년부터 집필
韓·佛, 과거·현재 절묘하게 교차
여성 서사 어려워… 쓸 때 더 집중
대학 때부터 습관처럼 소설 써 와
202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 당선
세계문학상까지 거머쥐는 경사
현대사 배경 대가족 일기 쓰고파
떠오르는 질문에 천착해 글 쓸 것
백팔 톤의 청동으로 만든 통일대불 앞을 지나칠 때에도, 그놈의 한 생각은 도대체 사라지지 않았다. 글을 쓸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곳에 대한 기억과 아쉬움. 하심을 갖도록 한 보제루 아래를 지날 때에도.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극락보전 앞에 섰을 때에도. 그래, 그곳에서 보낸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을 정리해야겠구나.
올해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임택수는 방황을 거듭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인생행로를 찾아 나가는 두 여성을 형상화한 장편소설 ‘김섬과 박혜람’으로 제20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에서 도슨트로 활동한 박혜람은 폭설 속에 어렵게 귀국하지만 짐을 분실해 오랜 친구인 김섬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다. 혜람은 타투이스트인 섬의 달라진 일상을 알아채지만, 섬은 어느 날 오랜 감정의 찌꺼기를 터뜨리며 우정은 일대 위기를 맞는다. 혜람은 강원도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새 생활을 시작하고, 섬은 헤어진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새 시작을 위해서 결단을 내리는데.
“어디서 왔는지 작은 벌레 한 마리가 테이블 위를 기어 다녔다. ‘이게 뭘까요?’ 김섬이 말했다. 남자는 김섬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죽은 듯이 걸음을 멈추고 꼼짝하지 않는 벌레 한 마리. ‘소나무허리노린재네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왔을까?’ 남자는 벌레가 들어온 입구라도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작품은 한국과 프랑스,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교차시키면서 타투이스트 김섬과 도슨트 박혜람 두 여성의 만남과 갈등, 연대 서사를 깊이 있게 구축하면서 삶과 사랑, 생명에 대한 사유를 철학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남성 인물을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친근하게 여성 인물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성성의 유연함을 선호하는 것 같다. 잘 몰라서 오히려 집중을 할 수도 있었고. 이번 작품에선 아이를 키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했는데, 자신의 몸 일부로 직접 태아와 관계를 맺는 여성의 생각이 남성과 다를 수 있어서 특히 어려웠다.”
―독자와 함께 공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는지.
“박혜람은 파란의 과정을 거친 뒤 설악산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게 되는데, 돌아올 때도 갈 때도 이유는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어떻게 보면 좀 실패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패한 사람들, 어떤 중단된 삶을 사는 사람들, 계획과는 좀 어긋나게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를 건네고픈 마음이었다. 거기엔 나 자신도 포함된다. 중간에 꺾이더라도 계속 나아가기를 바라는 위로나 격려를 하고 싶었다.”
검정고시를 통해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극단에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해서 처음에는 서울예대 연극과를 지원하려 했다. 막상 원서를 내기 위해서 서울예대에 갔다가 자신이 좋아했던 시인 김혜순과 소설가 최인훈, 박기동이 연극과가 아닌 문예창작과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헌책방을 전전하며 독학하던 그에게 문학의 빛을 뿌려주던 그들이….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겨울, 그는 진주에서 서울로 이사하는 과정에서 학교를 그만뒀다. 열다섯 살 소년은 을지로 입구 인쇄골목에 위치한 인쇄소 앞에 홀로 섰다. 나이가 어려서 자신보다 세 살 많은 형이라고 속이고 인쇄공으로 일했다. 1992년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9년여 온갖 일을 전전해야 했다. 인쇄공, 공사판 인부, 전화기 보조상품 영업직, 한식당 주방장, 재단사, 음악다방 DJ…. 홀로 독학을 하던 그는 이때 헌책방에 깔린 청하출판사의 책들을 모조리 탐독했다. 알베르 카뮈를 읽자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이 눈에 들어왔다. 김혜순의 시집과, 최인훈, 박기동의 소설을 만났다. 지방에 살던 누나가 두고 간 알베르 카뮈의 잠언집에 심취하기도 했다.
문창과 92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1학년 때에는 김혜순 시인의 작품을 보며 시를 썼다가 소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그에게 소설 쓰기를 권하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습관처럼 글을 썼다. 큰 각오를 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신춘문예에도 응모해 왔다. 취미생활이 아닌 글쓰기를 위한 독서도 계속했다. 조세희, 김원일, 이동하, 박기동, 최인호 등 1970년대 작가들은 문청의 여로에 작은 등불을 비춰 줬다. 소설가 임택수의 원점이었다.
“저의 형제가 10남매인데, 장기적으로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40~50년간 대가족이 지나온 이야기, 대가족 일기를 한번 써보고 싶다. 한편으론 제가 지금 불교계에서 일을 하는데, 여기에서 만나는 인연과 사람들 역시 만만치 않더라. 그분들이 지나온 개인적인 역사에도 귀 기울이고 싶다. 단기적으론 어떤 질문들이 곧잘 일어나는데, 그런 것들에 천착하며 글을 쓸 것이다.”
매일 새벽 3시50분이 되면 자연스럽게 눈을 뜬다. 새벽 4시 반부터 법당으로 올라가 새벽예불을 하고, 새벽 5시부터 ‘금강경’ 기도를 드린다. 새벽 5시 반부터 방으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으로 일을 시작하고, 오전 8시에는 사무실로.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절을 찾는 오후 2시부터 일정이 시작돼 다음 날 오전 11시까지 일에 꽁꽁. 2013년부터 조계사와 설악산 신흥사 등에서 템플스테이 업무를 해온 소설가 임택수는, 지난해 8월부터 지방의 한 사찰에서 템플스테이 업무를 하고 있다. 그에게 삶과 인연은 순간순간이 소설이고, 그 소설은 다시 순간순간 삶과 인연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삶과 소설은 그렇게 영원으로, 그리고 선(禪)으로….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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