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이태준과 좋은 글
고통받지 말라(Don’t suffer). 어느 피아니스트의 마스터클래스에서 들은 말이다. 빠르고 세게 연주할 때 거의 피아노 건반을 부술 만큼 힘이 잔뜩 들어가기 쉽지만, 그러면 연주자가 괴롭기만 할 뿐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는 조언이었다. 정확히는 힘을 빼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수영할 때 힘을 빼야 부드럽고 유연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 피아노를 연주할 때도 그래야 풍부하고 질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마음이 모든 아름다운 것을 망친다. 하지만 글쓰기가 직업이면서도 모니터 앞에서 지나치게 고통받지 않은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는 나는 동시에 궁금했다. 고통받지 않는 게 마음대로 되나? 수영과 피아노 연주가 그렇듯이 글을 잘 쓰려면 힘을 빼고 써야 하나?
식민지 조선의 소설가 상허 이태준(1904~?)이라면 먼저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왜 말은 쉽게 하는 사람이 많지만, 글은 쉽게 써내는 사람이 적은가?” 이제는 글쓰기 교본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문장강화>(1940)에서 그는 말한다. 말과 다르게 글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라고. 식민지 조선 최고의 문장가 중 한 명이었던 이태준은 1904년 철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님을 모두 여의었고 고학생으로 다녔던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도쿄 조치대학 문과 예과를 입학, 중퇴한 이후 귀국하여 개벽사, 조선중앙일보 등 여러 신문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30~1940년대에는 정지용, 김기림, 이효석, 유치진 등 당대 문인들과 구인회를 조직하고 전성기를 보냈지만, 해방 이후 정치사상을 추궁받으며 숙청당했다. 김기림으로부터 ‘스타일리스트’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미문가로 알려지기도,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시대에 사상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언제 읽어도 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담박한 글의 한 경지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태준의 단편, 중편, 장편, 번역, 산문, 평론 등을 망라한 ‘상허 이태준 전집’의 일부가 최근 열화당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니, 오랜 세월을 지나온 그 글맛을 음미할 좋은 타이밍이다. 그중 단편소설을 모아 1권으로 나온 <달밤>은 유독 그렇다. 표제작 ‘달밤’에서 성북동으로 이주한 주인공은 우둔하면서도 천진한 ‘못난이’ 친구 황수건과 조금씩 가까워지는데,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선 과장 없이 이렇게 단순하고 진솔하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열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그와는 아무리 오래 지껄이어도 힘이 들지 않고, 또 아무리 오래 지껄이고 나도 웃음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 기분이 거뜬해지는 것도 좋았다.” 그러다 장사도 망하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은 황수건이 술에 취해 혼자 골목을 지나갈 때는 그가 무안할까봐 나무 그늘에 몸을 감추고 가만히 쳐다보는데, 달을 바라보며 한 소절 외운 노래만 되풀이하는 황수건을 보며 그가 혼자 조용히 떠올리는 한 문장은 또 이렇게 애틋하고 미려하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
지독하고 치밀한 퇴고로 유명했던 상허가 글을 쓰며 고통받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받는 중에도 힘을 빼는 기술 혹은 아름다움을 망치지 않을 만큼 괴로운 비결은 <문장강화>에 그가 이미 적어놓았을지 모른다.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을 자기답게 표현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어느 분야에서든 최고 난도의 테크닉인 동시에 오랜 세월을 지나온 아름다운 글을 알아보는 이의 눈에야 제대로 발견되는 가치일 것이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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