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지평 너머] 금융시장의 약장수들
요즘은 볼 수 없지만 옛날엔 동네에 약장수가 가끔 찾아왔다. 마을 공터에 자리를 잡은 약장수는 사람들이 모여들면 “애들은 가라”고 외치면서 차력쇼를 선보인다. 건장한 장정들이 나와 맨손으로 철근을 구부리고 머리로 벽돌을 깨고, 입에서 불을 뿜기도 한다. 쇼의 열기가 고조될 때쯤 “이 약 한 번 잡숴봐”라며 약을 돌린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칠순 할배가 늦둥이를 본다”는 식의 대충 만병통치약이다. 약을 산 이들이 몇이나 됐는지는 기억에 없다. 약의 효험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없다. 수려한 말로 허풍을 떨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에게 “어디서 약을 팔아”라며 면박 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현대 자본주의 시장에서 대중이 이런 ‘약’을 살 가능성이 높은 곳이 금융시장이다. 금융기관들은 난해한 금융공학으로 파생상품을 만들어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며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파생금융상품은 당초 상품 가격이나 환율, 주가 등의 급변동 위험(리스크)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자산 형성을 위한 재테크 상품으로 선전되고 팔리고 있다. 왜곡된 파생상품은 금융시장은 물론 경제 전체에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상환능력이 없는 저신용자들에게 무리한 대출을 해주고 이에 대한 리스크를 각종 파생상품으로 쪼개고 합쳐 감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이어진 장면을 목격했다.
최근 파생상품 하나가 한국 금융시장을 흔들고 있다. 홍콩 증시의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을 산 많은 투자자들이 지수가 급락하면서 막대한 원금 손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 상품은 만기 때 홍콩H지수가 가입 당시의 70% 선을 넘으면 수익을 얻지만 그 밑으로 떨어지면 원금 손실이 발생한다. 지난달 8일부터 26일까지 만기가 도래한 ELS에서만 총 3121억원의 손실이 확정돼 원금 손실률이 53%에 달한다. 이 상품은 올 상반기에만 5조~6조원대의 손실이 예상되고 있다.
손실을 본 사람들 중에는 치매 초기 증상이 있다는 90대, 노후자금 수억원을 투자한 70대, 미성년자 등도 포함돼 있다. 이들 상당수가 손실 발생 가능성이 없다는 은행 직원들의 말을 듣고 상품에 가입했다고 한다. 투자자들은 시위에 삭발까지 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은행들에 대한 검사에 착수했고 은행들은 뒤늦게 ELS 판매 전면 중단을 선언하고 있다. 앞으로 이어질 투자자들과 은행들 간의 지난한 분쟁이 눈에 훤하다.
우리는 교훈을 얻지 못했다. 2019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때도 수천명의 투자자가 수천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문제가 된 DLF는 독일 국채 금리에 연계된 파생상품이다. 독일 국채 금리가 -0.3%보다 높으면 수익이 나지만 이보다 낮아지면 손실이 발생하는 구조였다. 은행 직원들은 당시 독일이 망하지 않는 한 국채 금리가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 거라 했고, 이번에는 중국이 망하지 않는 한 홍콩H지수가 폭락하지 않을 거라면서 상품을 팔았다. 그러나 각국 중앙은행이 경기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제로까지 내리면서 독일 국채 금리는 추락했고, 중국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홍콩H지수는 반토막이 났다. ‘검은 백조’(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만약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을 가져오는 사건)도 출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금융시장이다.
손실 위험이 큰 파생상품은 애초에 금융 전문가가 아닌 개인이 투자해서는 안 되는 상품이다. 투자은행(IB) 등 기관투자가들은 이런 상품에 투자할 때 손실을 회피할 반대 방향 투자 수단(포지션)도 함께 확보해 놓는다. 개인투자자들은 이런 리스크 회피(헤징)가 불가능하다. DLF 사태나 이번 ELS 사태에서 개인투자자들이 잃은 돈은 반대 포지션에 투자 또는 헤징한 기관투자가들에게 넘어가거나 그들의 손실 보전에 쓰였다. 이 과정에서 상품을 발행하고 판매한 증권사와 은행들은 수수료 수입을 챙겼다. 결국 희생되는 이는 개인들이다.
기울어진 시장 구조에서 개인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보다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 안정성을 기대하는 투자자들이 주로 찾는 은행에서 파생상품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손실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겠다”는 서약서를 쓴 개인에게만 판매하는 방법 등이다. 세계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에 낸 저서 <블랙 스완>에서 경제위기를 예견했던 나심 탈레브는 “다이너마이트에 경고 표시가 붙어 있어도 아이들에게 주지 말라”며 복잡한 금융상품을 일반 대중에게 파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최고의 상품을 창조해 내는 시스템이지만 대중이 투자를 하거나 상품을 살 때 약장수들에게 속지 않도록 보장돼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김준기 뉴스콘텐츠부문장 jk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미안하다,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