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병곡역 난투 사건
1644년 음력 12월21일, 경상도 병곡역(현 경북 영덕군 병곡면)에 근무하는 역인(驛人)들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갓 무과에 합격한 선달들이 변방 부임지에 가는 길에 단체로 병곡역을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역원은 관료들의 공무 여행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므로, 이들의 이용이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겨우 무과나 합격한 선달들이 꼴에 양반이라고 종까지 대동하고 떼로 들이닥쳤으니, 평소 높은 관료들에게 시달려온 역인들의 얼굴빛이 좋을 리 없었다.
역인들의 짜증은 선달들을 대하는 태도로 드러났고, 이러한 태도는 무관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선달들에게 푸대접으로 읽혔다. 특히 울산에서 출발했던 선달 박취문과 박이명, 그리고 이확은 이미 지나온 역에서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 역원의 기강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명분을 만들어, 강력하게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역로를 따라 소문이 퍼져 다른 역의 대접이 좀 더 나아질 수도 있을 터였다. 박이명과 이확은 젊은 종들에게 자리를 비운 역장을 잡아 오게 했다. 술에 취해 잡혀 온 역장을 거꾸로 매단 뒤, 다른 역에서 경각심을 가질 만큼만 매질하기로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역장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역장 가족과 친척들 수십 명이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며 병곡역으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이들은 역장이 거꾸로 매달린 것을 보고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다. 역장을 매단 새끼줄을 자른 다음 역인과 역장 친척들은 선달들에게 달려들었다.
역장이 매달려 있었던 좁은 방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역장을 때리기 위해 마련한 몽둥이는 선달들을 향했고, 그중 몇은 머리가 깨져 얼굴에 피가 낭자했다. 이들의 분노는 사달을 만든 박이명과 이확에게 집중됐다. 역인들은 두 선달을 내놓으라 소리쳤고, 박취문을 비롯한 동료 군관들은 이를 막느라 애썼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양반 체면을 살필 여력도 없이 선달들은 이리저리 도망쳤고, 박이명은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역인들의 폭행을 견뎌야 했다. 양반으로서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결국 이 사태는 영해부 형방이 출동하며 일단락되었다. 선달 한 명이 도망치면서 급하게 영해부에 이 사실을 알렸는데, 영해부사가 부재중이어서 형방이 나섰던 터였다. 영해부 형방은 역인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뒤 선달들의 종 몇 명에게 곤장을 치는 것으로 사안을 정리하기로 했다. 역인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던 형방이 역인들 편을 든 것이다. 결국 선달들은 상처만 얻은 채 쫓기듯 병곡역을 빠져나와야 했다. 풋내기 선달들의 치기 어린 혈기가 하필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역인들을 잘못 건드린 대가였다. (출전: 박취문 <부북일기>)
조선의 역원은 관리들의 공무 여행을 지원하기 위한 용도였으므로 그 규정만 지키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관행적으로 양반들은 공무가 아닌 일에도 툭하면 역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말을 제공받았다. 심지어 이들은 공공연하게 호화로운 접대를 요구하곤 했는데, 그에 따른 부담은 모두 역인들의 몫이었다. 게다가 국가 재정이 조금만 어려워져도 제때 비용 지원을 하지 않아 역인들의 불만이 컸다. 안 그래도 양반 관료들과 조정의 처사로 불만이 높아진 상태였는데 이제 막 무과에 급제한 신출내기 선달들마저 심기를 건드렸으니 역인들의 인내가 바닥날 만도 했다.
선달들의 섣부른 행동이 아니었어도 역인들의 불만은 언젠가 한 번쯤 터질 일이긴 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처한 사정을 알지 못한 선달들의 치기 어린 행동이 분노에 불을 붙였던 것도 사실이다. 차곡차곡 쌓인 불만이 비등점에 이르면, 작은 불씨 하나로도 이처럼 쉽게 폭발하기 마련이다. 위정자라면 최소한, 눈에 보이는 현실 이면에 축적되어 있는 국민의 불만을 먼저 살펴야 하는 이유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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