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옆집물리학] 행복, 애쓰지 않으면 머물 수도 없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가정뿐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어, 병에 걸려서, 외로워서…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제각각 다르다. 행복은 어쩌면 높은 산봉우리 정상, 손바닥만 한 좁은 땅 같은 곳일지 모른다. 동쪽으로 삐끗해 한 걸음 옮기면 건강을 잃는 내리막으로 접어들고, 오랜 친구 한 명을 잃는 남쪽 방향 한 걸음으로 큰 불행이 시작될 수도 있다. 행복이라는 불안정한 산꼭대기에서 저 아래 놓인 제각각 다른 수많은 불행의 골짜기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지천이다. 어느 방향으로라도 잠깐 발을 헛디디면 굴러떨어질 수 있는 한 뼘 크기 장소가 행복이 놓인 곳이다. 지금의 행복이 앞으로의 여전한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어쩔 수 없는 물리학자인 나는 톨스토이의 멋진 문장에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떠올린다. 1부터 10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는 10장의 카드를 나란히 순서대로 늘어놓을 수 있는 가짓수는 딱 하나지만, 이렇게 정렬되어 있는 카드를 뒤죽박죽 섞을 수 있는 가짓수는 정말 크다. 엔트로피의 값은 가능한 가짓수에 관련되어서, 순서대로 정렬된 카드 더미의 엔트로피는 작고 뒤죽박죽 섞인 카드 더미의 엔트로피는 크다. 눈 감고 섞으면 우리는 거의 항상 엔트로피가 늘어나는 것을, 정렬된 카드가 뒤섞이는 것을 본다. 마구잡이로 섞었는데 카드 더미가 순서대로 정렬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 법칙의 구체적인 예다. 커다란 고립계의 엔트로피는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만 갈 뿐 줄어들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나는 유리컵도 마찬가지다. 바닥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 중 하나를 다른 위치로 옮겨도 우리는 여전히 산산조각이 난 상태를 보지만, 멀쩡한 유리컵에서 바닥 한가운데 유리 조각을 억지로 떼어 내서 물컵 손잡이로 옮기면 물을 담을 수 없는 무용지물 물컵이 된다. 어쩌면 행복은 멀쩡해 보여도 쉽게 깨지는 물컵 같은 것, 애써 순서대로 맞춰 놓은 정돈된 10장의 카드 같은 것일지 모른다. 카드 한 장이라도 순서를 바꾸면 흐트러지는 아슬아슬한 정돈된 상태가 행복이라면, 수만 가지 방법으로 깨져 바닥에 흩어져 산산조각 난 유리컵이 불행의 모습일지 모른다.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내가 자주 경험하듯 아무리 말끔하게 정돈해도 내 책상 위는 금방 어질러지고, 깨끗하게 빨아 잘 다린 셔츠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여기저기 구김이 생겨 지저분해진다. 하지만 다시 책상을 정돈하고 셔츠를 빨아 다리면 낮은 엔트로피를 가진 말끔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은 고립계가 아니어서, 책상을 정돈하는 이와 셔츠를 다리는 이의 노력이 엔트로피가 끊임없이 늘어나는 것을 막는다. 모두가 함께 연결되어 살아가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오늘 출근길 거리 풍경이 어제와 다르지 않다면 수많은 이들의 노력에 감사할 일이다. 어제와 그리 다르지 않은 오늘의 내 삶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많은 사람 덕분이다.
불행의 이유는 제각각이라는 멋진 글에서 시작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을 가만히 지켜봤다. 비록 불행의 엔트로피가 행복의 엔트로피보다 크다 해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어쩔 수 없는 불행의 필연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불행을 되돌려 행복을 유지하려면, 어질러진 책상을 치우고 구겨진 셔츠를 다리듯,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비탈을 내려오는 커다란 바위를 끊임없이 다시 위로 밀어올리는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를 떠올린다. 불행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은 끊임없는 노력으로만 돌이킬 수 있다. 노력 없이 유지되는 행복은 없다.
요즘 난 평화를 자주 떠올린다. 카드 한 장이 자리를 바꿔 늘어난 카드 더미의 엔트로피는 그 한 장을 되돌려 놓는 작은 노력으로 다시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여러 번 뒤섞인 카드 더미를 원래의 정돈된 상태로 되돌리려면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잠깐 한눈판 사이 크게 훼손된 행복과 평화를 다시 회복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애쓰지 않으면 행복도, 평화도 곧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함께 애써야 모두의 행복과 평화도, 그리고 찬연한 세상의 모습도 이어지는 게 아닐까. 애쓰지 않으면 머물 수도 없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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