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는 다시 찾아올까
1990년, A는 톈진시 외곽의 한 국영 도축장에서 ‘돼지와 소를 잡던’ 도축공이었다. 조부모와 부모 모두 대대로 지식인이었지만 신중국 건국 뒤 각종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문혁) 등을 겪으며 집안이 초토화됐다. 문혁으로 모든 학교가 문을 닫은 탓도 있었지만 그는 ‘머리에 든 게 많으면’ 중국처럼 정치 부침이 많은 나라에서는 ‘계급의 적’으로 박해받았던 부모님처럼 오히려 삶이 힘들어진다고 생각해 고등학교 1학년을 끝으로 ‘가방끈’에 대한 미련을 잘라버렸다. 1976년 문혁이 끝난 뒤 주변 친구들은 ‘시대가 변했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려 했고 가족도 대학입학시험을 보라 권했지만 그는 일찌감치 돈 버는 ‘노선’을 택했다.
“중국은 기회의 땅이야, 너도 기회를 잡아봐”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국영 도축장 견습 도축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A는 1990년대가 되자 정말로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직장 동료들이 하나둘 다른 도시로 떠나거나 도축업 경험과 인맥을 바탕으로 개인 정육점을 차렸고, 대부분이 직장 월급보다 몇 배 많은 수입을 올렸다. 약삭빠른 일부 동료는 가족이나 친척의 명의로 가게를 차려, 직장 내 온갖 관계망을 통해 가장 싼 가격에 고기를 공급받아 몇 배의 이윤을 남기기도 했다. A도 더는 착하게 살 수만은 없다고 생각해 다른 동료들처럼 직장에 이름만 걸어둔 채 본격적으로 돈벌이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처음 A는 직장관계를 이용해 질 좋은 고기를 빼돌려 시장에 내다 팔아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뤘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얼마간의 자본과 인맥, 판로 등이 쌓이면서 본격적으로 사업다각화를 모색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경제특구 선전으로 가서 현지 시장 분위기를 보며 여러 사업을 구상했다. 홍콩과 맞붙은 선전은 당시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각종 ‘시장 자본주의’가 실험되던 사업가들의 천국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홍콩에서 유행하는 ‘짝퉁 산업’ 세계를 알게 됐고 ‘바로 이거다’ 싶어서 바로 ‘짝퉁 사업’에 뛰어들었다. 고향 톈진을 주요 판매처로 삼아 차츰 전국으로 판로를 뚫어갔고, 2000년에 이미 ‘거부’가 돼 있었다.
A를 처음 만난 것은 새천년이 막 시작됐을 때다. 여느 중국인들과 달리 ‘부티’가 자르르 흐르는 모습이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털가죽 잠바와 손목시계, 금목걸이를 걸치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사업가라고 소개했다. 평소에는 사업 때문에 전국을 순회하듯 출장을 다니며 살았고 명절이나 휴가 때 가끔 톈진에 온다고 했다. A는 내가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이었다. 그때 A는 부동산시장에 막 발을 들여놓았다. 톈진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부동산을 여러 채 구매해 임대사업을 하고 있었다. 도축공에서 정육 체인점 사장을 거쳐 짝퉁 사업가로 변신했던 그는 부동산 임대업자라는 또 다른 ‘신사업’에 눈떠가고 있었다.
자기 집으로 식사 초대를 한 A는 술이 몇 잔 들어가고 분위기가 농익어가자 거실에 있던 가정용 가라오케 장비를 켜더니 마이크를 들고 신나게 노래를 몇 곡 불렀다. 중간중간 다시 술 한잔을 하면서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중국은 기회의 땅이야! 도축공이던 내가 몇 년 만에 사장이 됐으니 말이야. 그러니 너도 중국에서 기회를 잡아봐!”
경쟁자에게 회사를 팔고 ‘부자 자본가’의 길로
“‘제가 남보다 특별히 똑똑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 1970년대 말 언젠가 베이징시가 독일제품 전시회를 열었을 때 장은 그 전시회를 보러 갔다. 당시 그는 베이징 외곽에 있는 식품점에서 한 달에 30위안을 받고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 전시회에서 특별한 사진 하나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벤츠 사진이었습니다. (…) 언젠가 제 소유의 벤츠를 운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지요.’ 현재 장은 메르세데스벤츠 두 대를 소유하고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저 같은 출신의 사람에게는 절대 이런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겁니다. 제 얘기를 쓴다면 이 말을 꼭 넣으셔야 합니다. 30년 전 제 처지를 생각하면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여행을 한 것 같다고 말입니다.’”(<중국인의 초상> 중, 자젠잉 지음, 김명숙 옮김, 돌베개 펴냄, 2012)
이 말을 한 사람은 2000년대 초반 베이징에서 가장 큰 가전제품 유통업체인 다중뎬치(大中電器)를 이끌던 민영기업가 장다중이다. 당시 중국에서 황광위가 이끌던 궈메이뎬치(國美電器)와 더불어 가전업계 투톱을 달리고 있었다. 2007년 12월, 장다중은 궈메이뎬치와의 오랜 경쟁관계를 끝내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라이벌 황광위에게 회사를 팔았다. 그리고 매각 대금으로 받은 천문학적인 현금으로 투자회사를 설립하고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되어 본격적인 투자자본가의 길을 걸었다. (그가 회사를 매각한 다음해인 2008년 라이벌이던 황광위는 주가조작과 자금세탁,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체포돼 업계에서 사라졌다.) 장다중도 A와 마찬가지로 1990년대 들어 시대의 흐름과 기회를 잘 포착해 성공가도를 달린 사업가였다.
1982년 판매원 일자리를 그만둔 장다중은 조그만 전파사를 차려서 오디오를 비롯해 각종 전자제품을 조립해 파는 ‘구멍가게’ 같은 회사를 운영하다가 A처럼 초기 원시자본 축적에 성공했다. 1990년대 들어 신흥 부자 사이에서 유행한 가라오케 사업을 해서 떼돈을 벌었고 이를 밑천 삼아 다중뎬치라는 대형 가전제품 전문매장을 차렸다. A의 집 거실에 놓여 있던 가라오케 설비도 어쩌면 당시 장다중이 남쪽 지방에서 운송해 베이징이나 톈진 등지에 팔았던 것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1990년대라는 ‘기회시대’의 동아줄을 잡고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시대의 행운아였다.
‘주선율’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 드라마
“기회 앞에 모든 사람이 다 평등했고, 기회를 잡으면 인생을 바꿀 수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기회라는) 바람을 타고 승승장구했고, 어떤 이들은 하루아침에 폭망하기도 했다. 내 이름은 아바오다. 여느 보통 상하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매일….”(왕자웨이 연출, 드라마 <번화>(繁華, Blossoms Shanghai) 도입장면 대사 중)
아바오는 중국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1978년, 상하이에 살던 스무 살 평범한 공장노동자다. 그는 도축공이던 A와 판매원 출신인 장다중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이후 모든 중국인에게 불어온 ‘기회’라는 바람을 타고 상하이의 상업 중심가 황허루에서 가장 성공한 ‘라오반’(사장)이 됐다.
1989년 천안문(톈안먼) 사태로 개혁·개방 정책을 바라보는 중국 내외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자’ 덩샤오핑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가장 먼저 상하이를 찾아가 대내외에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1990년 1월21일, 덩샤오핑은 그해 춘절을 상하이에서 맞이했다. 그리고 당시 상하이시장 주룽지로부터 푸둥 개발 보고를 받은 뒤 적극적인 찬성을 표하며, 푸둥 개발로 국제사회에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추진에 대한 결심이 단호함’을 보여주려 했다. 이후 지금의 ‘동방명주탑’으로 상징되는 푸둥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1990년에는 상하이와 선전에 신중국 이후 최초의 증권교역소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1992년 1월18일부터 2월22일까지 난창과 선전, 주하이, 상하이 등을 시찰하며 “경제발전 아니면 오직 죽는 길밖에 없다”는 그 유명한 ‘남순강화’를 발표했다. 중국인이 ‘위대한 시대’라고 부르는 1990년대의 탄생이었다.
최근 중국에서 유례없는 인기를 끈 드라마 <번화>는 그 1990년대 ‘위대한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A와 장다중, 그리고 상하이 아바오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총 30부작으로 2023년 말 방영해 2024년 1월9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번화>는 여러 면에서 ‘역대급’ 흥행과 화제를 일으켰다. 먼저 이 드라마를 연출한 감독이 그 유명한 홍콩의 왕자웨이(왕가위)라는 점이다. 1990년대 전설적인 홍콩영화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왕자웨이가 처음 만든 드라마이자, 또 처음으로 중국의 안방극장에서 방영됐다.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방영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고, 그중 가장 큰 관심사는 그의 드라마가 과연 중국 정부의 철벽같은 ‘검열 벽’을 뚫을 수 있을까였다. 대부분의 중국 드라마는 어느 정도 정부의 ‘애국주의’ 정서가 강요됐고 검열을 거친 흔적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우려와 달리, <번화>는 ‘뜻밖에도’ 중국 정부가 강제로 손댄 ‘이데올로기’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왕자웨이의 노련한 연출 덕분인지는 몰라도, <번화>는 지난 몇 년간 중국 안방극장에서 방영된 숱한 드라마 중 거의 유일하게 ‘주선율’(중국 정부의 선전·선동 정책을 직간접적으로 담은 내용) 냄새가 나지 않는 드라마이자, 왕자웨이의 화려한 색감이 특징인 영화 연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2024년 새해에 이 드라마가 과연 중국 안방극장에서 방영되는 게 사실인가 싶을 정도로 놀라운 수준을 보이고 있다. 왕자웨이는 역시 위대했다.
천안문 사태 이후, 팬데믹 이후 3년
드라마 <번화>는 루쉰 문학상 등을 받은 작가 진위청의 소설 <번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드라마는 공장노동자였던 아바오가 1978년 개혁·개방 이후부터 1990년대 상하이의 성공한 기업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았다. 그 과정에서 아바오와 주변 친구들이 살았던 1990년대를 모든 이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했던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로 묘사하고 있다. <번화>의 유례없는 성공 덕분에 지금 상하이는 여행 성지로 등극했고, 전국에 있는 상하이 식당들도 덩달아 매출이 몇 배 이상 껑충 올랐다고 한다. 드라마 속 아바오가 활보했던 상하이 황허루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런데 <번화>를 보는 내내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중국 정부는 왜, 지금 시기에, 그것도 거의 아무런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없는, 1990년대를 되돌아보게 하는 드라마를 중앙텔레비전 채널에서 방영하도록 허락했을까? 천안문 사태 이후 상하이를 찾았던 덩샤오핑이 그랬듯이, 지난 3년간의 ‘전체주의적’ 팬데믹 통제 이후 처참하게 무너진 경제와 대외 신뢰도, 차가운 민심을 회복하려 일부러 중국인의 기억 속에 가장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던 1990년대 분위기를 회고하게 하여 다시 한번 활기찬 시대를 만들어가려는 바람일까.
<번화>에서 아바오는 1990년대는 중국인에게 모든 가능성이 다 열려 있었고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좇던 시대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2024년, A와 장다중 그리고 아바오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바닥에서 옥상까지 뛰어올라가는 데는 1시간이 걸리지만 옥상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데는 8.8초가 걸린답니다. 주식도 바로 그렇죠.”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다. 마지막 말을 이렇게 바꿔도 무방할 듯하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적) 정치 민주화나 경제도 바로 그렇죠.”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베이징에 거주하는 필자가 중국의 숨은 또는 드러나지 않은 기억과 사고를 읽는 연재입니다.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