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과 잊혀진 시국사건 피해자 [왜냐면]

한겨레 2024. 1. 3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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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 1심 무죄 선고를 보며
‘사법농단\'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이종구 | 성공회대 명예교수

박근혜 정부 시절 사법농단 사태의 한가운데 서 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최근 1심에서 전면 승소했다. 5년 넘게 재판이 진행된 끝에 기소된 47개 혐의 모두에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까지 봐야겠지만, 일반 시민이 보기에 이른바 사법농단은 법적으로 근거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언론에 보도된 무죄판결 내용 가운데, 긴급조치 피해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법관에게 불이익을 주려 했다는 혐의도 벗었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197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에게 긴급조치는 일상이었다. 이 세대는 박정희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불과한 긴급조치 1호, 4호, 7호, 9호로 사형수를 포함한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을 기억한다. 양승태씨 사법농단 혐의 유·무죄와 별도로, 50년 전 긴급조치는 여전히 각급 법원과 과거사 청산기구들에서 쟁점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무죄라니, 법에 문외한인 생활인의 감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현실이다. 양승태씨가 사법부 수장이던 시절 긴급조치 피해자에게 불리한 판결이 다수 등장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는 ‘긴급조치 위헌합법론’이라는 희한한 대법원 판례(2015년 3월)도 등장했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규정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위헌이지만, 민주인사를 체포, 구금, 심문한 공무원은 정당한 직무를 수행한 것이므로 국가는 피해자에게 배상할 책임이 없다는 내용이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판례에 불복해 간혹 1, 2심에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소신 판결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법원에 가면 모두 기각이었다. 2022년 8월이 되어서야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므로 국가는 배상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전에 대법원에서 기각된 피해자들에게는 이 판례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야당이 2023년 5월 ‘긴급조치 피해자 민사재심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하였으나, 지금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다.

재판하다가 규칙을 바꿔 긴급조치 피해자가 다시 골탕을 먹는 일도 벌어졌다. 사유가 발생한 지 3년 이내에 배상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소멸시효 규정을 갑자기 6개월 이내로 축소한 게 대표적이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소송도 새로운 규칙에 따라 퇴짜맞았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 와중에 긴급조치나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시국사건과 무관한 일반 형사사건 피해자도 도매금으로 배상을 거부당하는 답답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이라도 소멸시효가 변경되기 이전에 접수한 소송은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 정도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만들어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도시근로자 평균 생계비 이하의 소득밖에 없는 관련자에게는 소정의 생활지원금을 지급했다. 생활지원금을 신청하려면 ‘국가와 민사상 화해를 한다’는 요지의 각서에 서명, 날인해야 서류를 접수할 수 있었다. 당시 신청자와 보상심의위 실무자 모두 각서를 형식적인 행정용 서식 정도로 생각했다. 참여정부 시절에 보상심의위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여부를 판단하는 ‘관련자 분과’ 위원으로 활동한 필자의 기억으로는 생활지원금 수령자가 국가배상을 청구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변호사 위원들도 생활지원금이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피해자는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면 해결되는 일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달라져 화해 각서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2014년 3월 대법원은 “민주화운동 보상법에 따른 보상금 명목의 생활지원금을 받았다면 국가를 상대로 별도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확정판결을 내려 피해자들을 법원 문전에서 쫓아냈다. 결국 생활지원금 신청 자격이 안 되는 고소득자만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한 피해자의 가족은 생활지원금 지급 대상이 아니므로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지만 당사자인 본인은 청구할 수 없다는 모순된 상황도 만들어졌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례들과 같이, 양승태 사법부 시절(2011년 9월~2017년 9월)에 법적 절차를 통한 과거사 청산이 정체, 퇴행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피해자나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촛불정부와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에도 일단 확정된 대법원 판례와 소송규칙을 변경하려는 노력이 미진하였다. 즉, 사법부의 신뢰와 정당성의 저하라는 진짜 심각한 사태가 전 정부에서도 현 정부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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