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걸릴 일, 1분이면 끝"…'AI 변호사'에 법조계 뒤집어졌다 [긱스]

고은이 2024. 1. 3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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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산업 바꾸는 AI
英 루미넌스, 계약 전담 AI 선보여
엘박스·로앤굿 등 국내 벤처 주목
법원·경찰도 업무에 AI도입 검토
KISDI "리걸테크가 시장 키울 것"
업계 "판결문 공개해야 기술 발전"
AI역할 확대에 법조계 반발도

“나는 학교폭력 피해자다. 친구가 매일 이유도 없이 때린다. 고소하고 싶어도 우리 엄마는 돈이 없다. 이런 나를 위해 고소장 샘플을 만들어줄래?”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오픈AI의 챗GPT에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퇴임을 앞두고 최근 세종시에서 연 공무원 대상 강연에서다. GPT-4 기반 챗GPT는 학교폭력 고소장 양식을 줄줄이 내놨다. 보수적이던 법률 분야에 인공지능(AI)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법조계에선 기존 로펌 변호사가 맡던 업무 중 상당 부분을 AI가 대체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변호사 돕는 AI 기술

그래픽= 이정희 기자


31일 리걸테크업계에 따르면 영국 기업 루미넌스는 사람이 전혀 개입하지 않고 계약서 검토부터 협상까지 한 번에 끝내는 AI 프로그램을 최근 내놨다. 협상 전문 AI가 계약서 내용을 검토한 후 상대 AI와 계약서를 주고받는다. 문제 조항이 있다면 빨간색으로 긋고, 더 적합한 것으로 바꾼다. 인간 변호사는 최종 서명 단계에 참여한다.

법률 AI가 변호사들의 업무 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사례다. 미국의 한 로펌은 리걸테크업체 키라시스템스의 서비스를 도입한 후 변호사 업무량을 평균 48% 줄였다. 변호사가 검토해야 할 계약서상 불공정 조항을 AI가 분석해 시각화한 자료를 제공받은 효과였다.

한국 로펌들도 문서 분류와 외국어 번역 등 단순 작업을 AI에 맡기고 있다. 법무법인 세종은 의견서, 소장 등 법률 문서를 나누는 데 AI를 활용한다. 율촌은 영상에서 텍스트를 자동으로 뽑아내주는 AI 시스템을 도입했다. 변호사 시장을 겨냥한 국내 스타트업 서비스도 많다. AI 판결문 검색 서비스를 운영하는 엘박스는 국내 변호사 절반이 이용한다. 인텔리콘연구소의 문서 분석 솔루션인 도큐브레인도 여러 로펌이 활용하는 서비스다.

 ○‘AI 변호사’ 논란도 거세

AI 바람이 법률 분야에서 유독 뜨거운 것은 문서 작업이 많은 업무 특성 때문이다. 업계에선 법률산업이 AI 기술의 테스트베드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2027년 전망되는 법률 AI 시장 규모는 465억달러(약 62조원). 골드만삭스도 최근 보고서에서 법률산업 전체 업무의 44%가 자동화될 것으로 분석했다.

AI 발전이 법률산업을 혁신할 것이란 기대도 크다. “가난한 사람들의 소송 접근성을 높이고, 법률 연구를 혁신하며, 소송을 빠르고 저렴하게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존 로버츠 미국 대법원장)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은 최근 리걸테크의 존재만으로도 전체 법률시장이 27% 확대된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확대 효과가 취약계층에 집중된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다만 AI 변호사에 대한 논란은 늘 따라붙는다. 최근엔 프랑스 리옹 출신 한 기업가가 개발한 아이아보카라는 앱이 이슈가 됐다. ‘변호사가 1년 걸릴 일을 1분이면 해결한다’는 홍보 문구가 문제였다. 연 69유로에 법률 조언을 제공한다는 AI 변호사의 등장에 프랑스 법조계가 뒤집혔다. 개발사는 아보카(변호사)를 빼고 ‘인텔리전스 리걸’로 앱 이름을 변경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2년여 전 이미 벌어졌다. 2021년 AI 형량 예측 서비스를 내놨다가 변호사단체의 반발로 서비스를 포기해야만 했던 로톡이다.

 ○다양해지는 리걸 AI 서비스

법률 문서의 요약과 정리에 필요한 시간을 AI가 줄여줄 것이라는 데는 법조계도 이견이 없다. 챗GPT와 구글 바드는 한국 법률 데이터를 따로 학습하지 않고도 입력한 지시어에 따라 고소장 초안을 작성할 수 있다.

보수적이던 법원과 경찰 등도 AI 활용에 전향적이다. 법원행정처는 재판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재판 지원 도우미AI’(가칭)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법원 내 ‘AI 전도사’로 불리는 강 부장판사는 최근 퇴임 법관 만찬 자리에서 “AI를 쓰면 모든 판사에게 연구원 3명 이상을 붙여주는 효과가 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경찰청 역시 시민들이 AI로 쉽게 고소장을 작성할 수 있도록 AI 시스템 도입을 검토 중이다.

AI를 활용한 리걸테크 서비스는 다양해지고 있다. BHSN은 이날 AI 리걸 솔루션 앨리비를 출시했다. 기업 내 모든 부서에서 진행하는 계약 및 자문 등을 AI로 해결할 수 있는 올인원 법무 서비스를 제공한다. 로앤굿은 이혼, 교통사고, 성범죄 등에 특화한 챗봇인 로앤봇을 운영하고 있다. 젠아이피(특허 출원 작성) 엘박스(판결문 검색) 베링랩(법률 AI 번역) 등도 주목받는 한국 리걸테크 스타트업이다.

스타트업의 AI 기술은 고도화하고 있다. 로톡 운영사인 로앤컴퍼니는 GTP-4를 활용해 자체 개발한 빅케이스GPT가 변호사시험 객관식 문제에서 53.3%의 정답률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GTP-4를 그대로 적용했을 때의 정답률(34.0%)보다 훨씬 높다.

 ○“판결문 데이터 공개해야”

AI의 ‘할루시네이션’(환각·그럴싸한 거짓말) 문제는 리걸테크회사들이 풀어야 할 과제다. 업계는 할루시네이션 해결과 기술 고도화를 위해 한국 법원이 판결문 데이터를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법률과 판례, 논문을 기반으로 작성한 엄청난 양의 판결문이 ‘AI 학습의 보고’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공개되는 판결문은 극히 일부다. 엄격한 익명 처리 때문에 마치 암호문 같다. 민명기 로앤굿 대표는 “극소수 판례를 제외하고는 판결문 하나당 1000원을 내고 사야 하는 상황”이라며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리걸 AI 개발이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리걸테크 진흥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리걸테크의 다양한 서비스가 변호사법 저촉 여지가 있어 기술이 고도화할수록 법적인 딜레마가 크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소송 검토, 법률 상담 등 다양한 영역에서 AI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입법적인 보완이 절실하다”며 “입법이 늦어질수록 국내 리걸테크의 글로벌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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