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도, 약자 지원도 잃었다…예산 삭감 이후 몰아친 추운 겨울
“약자 지원 사업은 어찌 될지, 또 내 일자리는 어찌 될지 모르겠다.”
지난해 11월 여성·청소년·이주민·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민간위탁 사업의 활동가들은 2024년도 예산 삭감 소식을 듣고 이같이 우려했다. 해가 바뀌고 한 달이 흐른 31일, 우려는 현실이 됐고 이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정부는 올해 예산 집행 계획에 따라 사업이 이어지고 있으므로 사회적 약자 보호에 빈틈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끊기고 잘리고 닫히며 사라진 역할이 바로 현장에서 복원될 지는 미지수다.
“두 줄로 통보받은 청소년 노동 상담 사업 종료”
경북 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 근로보호 담당자로 일하던 김은영씨는 지난해 12월28일을 끝으로 계약만료를 통보받았다. 청소년을 상대로 노동상담과 노동인권교육을 해 온 김씨를 비롯해 전국의 35명 상담가가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여성가족부가 청소년 근로권익보호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예산 삭감으로 인한 사업종료’ 단 2줄이 적힌 공문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간단하게 사업이 종료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왜 사업이 종료됐는지 김씨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노동인권 교육을 할 때마다 학교 교사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았다”며 “2022년 11월 사업 시작 후 성과 통계나 의미를 도출하기도 전에 사업을 종료한다고 해 더는 국가가 하는 정책에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일자리를 잃은 김씨는 당장 생계유지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아이 둘을 키우는 그는 “남편이 혼자 벌어선 아이들을 키우기 어려워 일자리를 잃은 타격이 크다”며 “청소년들에게 노동자 권리와 안전을 얘기하던 우리가 거꾸로 노무사를 찾아 이런 고민을 얘기하는 상황이 당혹스럽다”고 했다.
“아직도 센터에서 하던 한국어 교육 찾는데”
인천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에서 14년간 이주노동자들의 한국어 교육을 책임졌던 김미현씨도 지난 1일부터 구직을 시작했다. 고용노동부가 이주노동자지원센터 예산을 삭감한 탓에 김씨가 일하던 인천센터를 포함해 전국의 센터들이 전부 문을 닫았다.
노동부는 ‘외국인근로자 지역정착 지원사업’을 새로 시작하며 사업을 맡을 9개 광역 자치단체를 공모하고 있다. 그러나 김씨 같은 센터 직원들은 기존에 일하던 센터가 새로운 사업의 위탁기관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공모 결과를 마냥 기다리긴 어렵다고 했다. 김씨는 “다른 지역 센터 직원들도 창업하거나 행정사 준비를 한다고 들었다”며 “10년 이상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며 노하우를 쌓아온 이들이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아쉽다”고 했다.
일요일마다 센터를 찾아 한국 생활 적응에 도움을 얻던 이주민들은 여전히 김씨에게 연락을 해온다. 김씨는 “네팔이나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이 ‘새로운 친구들이 한국에 왔는데 이제 어디서 한국어를 배워야 하느냐’ ‘센터가 언제 다시 문을 여냐’고 물어본다”면서 “올해 16만명 넘는 외국인 노동자가 새로 들어온다는데 이렇게 센터를 찾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당장 이번 달 생활도 너무 빠듯”
군포시자립생활센터에서 ‘중증장애인 동료지원가’로 일하며 다른 장애인들의 취업 의지를 북돋던 정태민씨도 올해 1월부터 일자리를 잃었다. 노동부가 전액 삭감하려던 동료지원가 사업 예산은 복구됐지만 사업 주무부처가 노동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바뀌면서 문제가 생겼다. 복지부가 사업을 새롭게 맡다보니 사업 공문은 언제 내려올지, 정씨가 일하던 센터가 사업을 다시 위탁할 수 있을지 등이 불분명해졌다. 정씨는 “사업 공문이 언제 내려올지 알 수 없고 빠르면 5월이라고 들었다”면서 “그전까지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갑자기 줄어든 소득에 생활은 더 빠듯해졌다. 정씨는 “비장애인은 갑자기 실업자가 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지만 장애인은 기초생활수급자 조건을 맞추려면 실업급여 신청도 어렵고 복잡하다”며 “1월까지는 수급비도 40만원 정도 적게 들어와 이번 달 생활이 아주 힘들었다”고 했다.
정씨는 다른 장애인들의 취업을 도우며 느끼던 효능감이 사라진 것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18년간 시설에서 생활한 정씨는 자립하고 취업하며 모은 정보를 다른 장애인에게 나누는 데서 큰 기쁨을 느꼈다고 했다. 정씨는 “동료지원가로 계속 일할 수 있는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마음이 안 좋았다”면서도 “그래도 센터가 자리를 다시 잡으면 동료지원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려 한다”고 했다.
“정부 예산 없이 어떻게든 이어가 보려 해”
제주여민회에서 고용평등상담실 상담가로 일해 온 안김현정씨도 더이상 상담 업무를 하지 못하게 됐다. 노동부가 24년간 여성들의 직장 내 성폭력 등 고충을 상담해 온 민간 고용평등상담실 예산을 전액 삭감했기 때문이다. 정부 예산 없이 상근 상담가의 인건비를 마련하기 어려워진 제주여민회는 앞으로 직접 상담 대신 다른 기관으로의 상담 연계에 집중할 계획이다.
어떻게든 고용평등상담실을 이어가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지난 해 12월28일부터 이틀간 상담실 운영비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여 5000만원을 모았다. 수원여성노동자회의 11년차 활동가 김지선씨(가명)는 “모금운동에 달린 응원 댓글을 보면서 상담실의 필요성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지 느꼈다”면서 “정부 지원 예산이 없으면 상담가 1명분의 인건비도 부족한 상황이지만 한국여성노동자회 11개 지부는 올해 상담실을 운영하기로 전부 결의했다”고 했다.
김씨는 “이번 정부 들어서 여성 공공인프라를 없애고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너무 확연하다”면서 “정부가 해야 하는 역할을 이런 식으로 축소해버리면 결국 피해 보는 것은 직장 내 성차별을 겪는 여성들”이라고 했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11201725001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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