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캐나다 국경에도 장벽 건설하자”…美대선 최대 쟁점 된 ‘불법이민’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2024. 1. 3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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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DB
지난달 21일(현지 시간) 미국 뉴햄프셔주(州)의 주도 콩코드. 중심가 뒤편으로 한적한 대로변에 자리잡은 노숙자 겨울 쉼터 앞에는 펄럭이는 성조기 아래 타다만 담배꽁초들이 흩어져 있었다.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쉼터에는 현재 마약 중독자와 노숙자 외에 불법 이민자들도 수용돼 있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을 넘어온 불법 이민자들이 영하 10도를 밑도는 강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주정부가 이곳을 비롯한 10여 개 쉼터에 이들을 나눠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근 편의점 주인 그레이 씨는 “지난해부터 이민자가 늘기 시작하더니 최근엔 쉼터가 거의 이민자들 차지”라고 전했다.

불법 이민자 문제가 최근 미 대선의 최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멕시코와 맞닿은 미 남서부 국경이 기록적인 불법 이민자들의 월경 시도로 폐쇄 위기에 놓인 가운데, 미 북부 국경 역시 전례 없는 불법 입국자 급증으로 논란이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 시 불법 이민자 수백만 명을 즉각 추방하겠다”고 공약한 데 이어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남서부 국경 폐쇄 등 강경 대응 방침으로 선회한 상황이다.

북부 국경까지 퍼진 불법 이민

뉴햄프셔주 프라이머리가 열린 23일 트럼프 전 대통령은 런던데리의 한 투표소를 방문한 뒤 기자들과 만나 “남부 국경이 전례 없는 수준이지만 북부 국경도 상황이 나쁘긴 마찬가지”라며 “이는 미국에 닥친 최악의 비극 중 하나”라고 했다.

앞선 20일 트럼프 전 대통령과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경쟁하고 있는 니키 헤일리 전 주유엔 미국대사도 “남부 국경만이 아니라 북부 국경도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며 “불법 이민자들을 막는 데 필요하다면 장벽을 세우고 국경 순찰도 해야 할 것”이라 했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설치된 국경 장벽처럼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도 ‘장벽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최근 미국과 캐나다 사이 국경을 통해 불법 이민자들이 급증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미 북부 국경의 불법 이민자 적발은 18만9402건으로 전년도보다 2배 이상인 10만9535건이 늘어난 수치다. 2021년 북부 국경에서 적발된 불법 이민자가 2만7000여 명에 그쳤던 것을 감안하면 2년 사이 7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공화당 소속 엘리스 스테파닉 하원의원은 29일 “뉴욕주 국경에서만 지난해 9만1000건의 불법 이민자 월경이 있었다”며 “불법 이민자들의 이동이 놀라운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북부 국경을 통한 불법 이민자가 늘어나고 있는 건 그만큼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통한 불법 이민자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텍사스주 등 남부 주들이 감시와 순찰을 크게 늘리자 불법 이민을 주선하는 범죄조직들이 상대적으로 감시가 덜한 북부 국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특히 남부 국경의 순찰 인력이 부족해 북부 국경의 순찰대원들이 대거 남부로 이동하면서, 북부 국경 감시가 허술해진 상황도 불법 이민자 증가를 부추겼다.

불법 이민의 증가는 마약과 무기 밀매, 돈 세탁, 인신매매 등 각종 범죄 증가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면서 주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크리스 스누누 뉴햄프셔 주지사는 국경 보안 강화를 위해 140만 달러(약 18억6900만 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북부 국경과 상당히 떨어진 메사추세츠주도 네 곳의 대규모 이민자 수용시설을 지정하는 등 불법 이민 대응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뉴욕시는 텍사스주에서 보낸 불법 이민자에 북부 국경을 통해 유입된 불법 이민자들이 크게 늘어난 뒤 인도주의적 위기를 선포하기도 했다.

“바이든 행정부서 2배 늘어”

미국에서 불법 이민자 문제가 크게 확산된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이 컸다. 코로나19로 주변국에서 일자리가 대거 사라지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려는 이들이 크게 늘어났다. 여기에 아이티 등 일부 국가들의 정치 불안과 마약 카르텔의 폭력 사태, 기상이변으로 인한 자연재해가 낳은 수백만 명의 난민이 피난처를 찾아 미국 이주를 시도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명목으로 불법 이민자를 즉각 추방하도록 한 ‘42호 정책’이 지난해 5월 종료된 건 화룡점정이었다. 다소 소강 상태를 보였던 불법 입국 시도가 지난해 하반기 들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바이든 행정부가 질서 있는 망명을 위해 추진해온 정책들도 역효과를 내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42호 정책 종료 뒤 망명 신청자가 앱을 통해 사전에 입국 신청을 하고 불법으로 입국하다 적발되면 향후 5년간 미국 입국을 금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망명 신청 자격이 없는 이들도 일단 입국 기회를 잡기 위해 몰려들면서 예약 시스템이 사실상 마비돼 버렸다.

눈에 띄는 건 트럼프 행정부 당시 시행했던 불법 입국자 가족 강제격리 정책이 종료되자 가족 단위의 불법 이민자들이 크게 늘어난 점이다. 미 세관국경보호국(CBP)에 따르면 남부 국경에서 체포된 가족 동반 불법 입국자 수는 지난해 100만 명을 넘어섰다. 2021년 48만 명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메릴 매튜스 텍사스주 정책혁신연구소 연구원은 의회전문지 더힐 기고에서 “2019년 미국 내 불법 이민자는 1020만 명 수준이었지만,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1000만 명의 이민자가 추가로 국경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불법 이민 문제가 경제보다 중요”

불법 이민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대선과 맞물리며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지난달 7일 미 CBS방송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가 불법 이민자에게 더 강경한 정책을 펴야 한다는 응답자는 63%였다. 지난해 9월 조사 당시 55%보다 더 높아졌다. 에머슨대가 30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선 공화당 유권자의 36%가 불법 이민이 가장 심각한 이슈라고 응답했다. 물가 상승 등 경제 문제를 꼽은 응답자(30%)보다 많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바이든 대통령은 26일 “의회가 권한을 주는 즉시 국경을 폐쇄하겠다”며 강경 노선으로 선회했다. 백악관과 상원은 5~7일간 평균 불법 이민자 수가 4000∼5000명을 넘어서면 난민 심사를 중단하고 국경을 폐쇄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합의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친(親)트럼프 강경파가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공화당 하원 지도부는 “바이든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통해 즉각 국경을 폐쇄해야 한다”며 이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때문에 불법 이민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소셜미디어에 “공화당을 나쁘게 보이게 만드는 민주당의 복잡한 국경 법안은 필요 없다”며 “내가 재집권하면 바로 (행정명령을 통해) 국경을 폐쇄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 대통령은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 종료로 미국이 인도주의적인 국가임을 과시하고 미국인들에게 정부가 다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며 “하지만 국경이 혼란에 휩싸이고 재선이 위태로워지자 이런 약속은 모두 미뤄져 버렸다”고 지적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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