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작업중지권' 아시나요…대법원 판결에 노동현장 '주목'

대전CBS 김정남 기자 2024. 1. 3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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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공장서 화학물질 누출사고 발생해 작업장 이탈했다 '정직'
1·2심 노동자 작업중지권 인정되지 않았지만 대법원 다른 판결
노동단체 "중대재해 막지 못하는 현실…입법목적 맞게 실현돼야"
대법원 전경. 법원 홈페이지


'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 사업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근로자가 믿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때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한 근로자에 대해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된 '근로자의 작업중지'에 대한 내용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목소리다.

최근 대법원에서 '근로자의 작업중지권'을 인정하는 취지의 판결이 나오면서 노동현장이 주목하고 있다.

인근 공장 화학물질 누출에 대피했다 '정직 처분'


지난 2016년 7월 26일, 세종시 부강산업단지에 있는 A 공장에서 화학물질인 티오비스가 두 차례 누출됐다.

티오비스는 공기 중에서 반응하게 되면 독성이 강한 황화수소로 변질될 수 있는 물질이다.

당시 소방본부는 사고지점으로부터 반경 50m 거리까지 대피하라는 방송을 했고, 반경 500m~1㎞ 거리에 있는 마을 이장들을 통해 주민들에게 창문을 폐쇄하고 외부 출입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는 방송도 이뤄졌다. 산업단지 관리사무소장은 통제선 내 공장 노동자들에게 대피를 유도했다.

누출사고 다음날까지 A 공장과 주변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 30명이 두통과 어지러움, 오심, 구토 등을 호소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다. 27명은 통제선 내 공장 직원이었지만 3명은 통제선 밖 공장 직원이었다.

당시 반경 200m 정도 거리에 있던 B 공장의 금속노조 소속 조남덕 지회장은 다른 공장 관계자로부터 누출사고 발생 소식을 들었고 파악 및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근로감독관에게 대피를 권유받고 소방본부로부터는 대피방송이 있었다는 취지의 답변을 들었다. 조 지회장은 작업장을 이탈하면서 당시 작업 중이던 조합원 28명에게도 대피하라고 말했다.

이후 사측은 징계위원회를 열어 조 지회장에게 작업장 무단이탈 등을 이유로 정직 3개월 처분을 내렸고, 조 지회장은 사측을 상대로 정직처분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 모두 조 지회장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B 공장의 경우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섣불리 작업을 중단하고 공장을 이탈한 것으로 판단됐다.

1심 재판부는 "원고(조 지회장)가 누출사고에 대해 유관기관 및 B 공장 측이 상황을 통제하면서 조치를 취하고 있음을 인식했고 이 사고가 회사 직원들의 생명·신체에 위험을 초래한다고 볼만한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대피의 필요성에 대한 별다른 검토를 하지 않은 채 섣불리 작업을 중단하고 피고 회사 공장을 이탈했다"고 밝혔다.

대법원까지 간 '노동자 작업중지권' 다툼


재판은 2018년 대법원으로 넘어갔는데, 최근 대법원은 노동자 작업중지권의 적법성을 다시 살펴야 한다며 사건을 다시 대전고법으로 내려보냈다.

대법원은 "황화수소 분산으로 인한 피해 범위를 명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웠고, 당시 누출사고 지점으로부터 200m 이상 떨어진 공장에서도 오심과 구토, 두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이 발생했던 사정 등에 비춰 보면 B 공장이 유해물질로부터 안전한 위치에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또 "이미 대피방송을 했다는 취지의 소방본부 설명과 대피를 권유하는 근로감독관 발언을 토대로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대피하면서 노동조합에 소속된 다른 근로자들에게도 대피를 권유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원심은 원고의 작업중지권 행사가 적법하지 아니하다는 전제에서 징계사유의 존부와 징계양정의 적정 여부를 판단했다. 원심의 이러한 판단에는 작업중지권 행사의 요건,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의 판단기준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함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금속노조 법률원 충남사무소의 이두규 변호사는 "작업중지권 행사의 적법성을 정면에서 긍정한 첫 사례"라며 의미를 설명했다.

이두규 변호사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은 누구의 인식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산업재해가 발생한 급박한 위험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노동자는 상황을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작업중지권을 집단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가 등의 쟁점이 있는 사건"이라며 "결과적으로 대법원에서 노동자가 정당하게 작업중지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판단해주셔서 조금 늦긴 했지만 참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리임에도 작업중지 위해선 높은 결단과 각오가 필요한 현실"


지난 29일 대전고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김정남 기자

노동단체들은 현장에서 작동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이 중대재해를 막지 못하는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며, 대전고법에서 열린 파기환송심을 주목하고 있다.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를 비롯한 노동단체들은 지난 29일 대전고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험을 중지하는 건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본능이며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터의 위험에 대해 노동자가 위험으로부터 대피하거나 작업중지를 하기 위해서는 높은 결단과 각오를 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자신의 생명과 동료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권리인 '노동자 작업중지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이 징계와 손배가압류로 받는 고통을 없애야 한다"며 "일터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감내하거나 묵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헌법과 산업안전보건법에서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규정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권현구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지부장은 "올바른 작업중지권 실현을 위한 과제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노동자의 집단적 작업중지가 분명하게 보장되지 않고 있으며, 작업중지권 범위 역시 매우 좁게 해석되고 있다. 위험 평가나 제거에 대한 노사 간 합의가 안 될 때 어떻게 노동자 권리와 안전을 보장할지 또한 불명확하다"고 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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