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인격·스파이·여성 히어로…낯선 소재, 사극으로 들어왔다
2021년 ‘연모’(KBS2)와 ‘옷소매 붉은 끝동’(MBC)을 시작으로 2022년 ‘슈룹’(tvN), 지난해 ‘연인’(MBC)까지 티브이(TV) 드라마에 퓨전 사극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퓨전 사극은 2010년대 들어 활발하게 제작됐지만 지상파 방송사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2018년 이후부터 그 빈도가 줄었다. 그랬던 퓨전 사극이 지난해에만 6편을 선보이는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대에 티브이 드라마의 자존심을 제대로 세워주고 있다. 2023년 오티티·티브이 통틀어 최고 화제작도 퓨전 사극 ‘연인’(MBC)이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가 많아지면서 현대극의 소재가 한계에 달해 자극성의 강도만 세지고 있다”며 “금기나 신분 차이가 존재해 억지스럽지 않게 다이내믹한 전개를 펼칠 수 있는데다, 시대와 인물 등 할 이야기가 많아 시청자들이 퓨전 사극으로 눈을 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퓨전 사극의 인기는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방송사들이 한해 분위기를 책임질 새해 첫 작품으로 들고나온 것도 퓨전 사극이다. 지난 2일 가장 먼저 ‘환상연가’(KBS2)가 시작했고, 12일 ‘밤에 피는 꽃’(MBC), 21일 ‘세작: 매혹된 자들’(tvN)이 뒤를 이었다.
세 작품에는 요즘 퓨전 사극의 유행이 보인다. 모두 퓨전 사극에서 잘 다루지 않는 설정으로 새로움을 더했다. ‘환상연가’는 가상의 국가 아사태를 배경으로 선과 악의 다중인격을 지닌 태자(박지훈)가 주인공이다. 자고 일어나면 선인 현과 악인 악희가 뒤바뀐다. ‘밤에 피는 꽃’은 집안에 갇혀 평생 죽은 남편을 그리며 살아야 했던 과부를 요즘 시대에 맞게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린다. 15년째 수절한 과부로 지내는 조여화(이하늬)가 밤에는 복면을 쓰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 ‘세작’도 사극에서는 드물게 세작(첩자)을 등장시켰다. 황 평론가는 “현대극에서는 익숙한 설정이라도 사극에서 다룬 경우가 많지 않아서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동안 퓨전 사극은 주로 남녀 주인공의 예쁜 사랑에 초점을 맞춰 ‘무늬만 사극’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는 실제 역사 등 굵직한 사건을 바탕으로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져 극 자체가 탄탄해진 것이 특징이다. 지난해 ‘연인’은 병자호란이 극 전반에 등장해 인물들이 전쟁의 역경 속에서 강인해지고 더욱 애틋해지는 효과를 냈다. ‘세작’도 시공간적 배경은 조선이 청의 침략을 받는 병자호란 직후부터다. 1회에서는 이인(조정석)과 강희수(신세경)의 설레는 감정에 집중했는데 4회에서 이인이 섬뜩하게 변하는 등 예상밖의 전개가 펼쳐지며 시청률이 이전 회차보다 두배 가까이 뛰었다. ‘밤에 피는 꽃’도 강필직(조재윤)을 중심으로 악인들이 아이를 납치해 파는 인신매매가 굵직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묵직한 정통사극처럼 오늘을 돌아보게 하는 메시지를 담기도 한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세작’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계략과 음모가 현실 정치를 연상케하고, ‘밤에 피는 꽃’은 수절을 강요당한 여성이 복면을 쓰고 민중을 지키는 영웅으로 변신하는 전개가 민생은 돌보지 않고 정쟁만 벌이는 현실 정치의 답답함을 해소해주고 있다”고 짚었다. 황 평론가는 “‘밤에 피는 꽃’은 과부뿐만 아니라 폭군 남편인 호조판서의 아내 오난경(서이숙), 조여화를 돕는 양민 연선(박세현) 등이 그 시대 여성의 욕망을 다양하게 그리고 있어 의미가 있다”고 했다.
다양한 장르를 접목하려는 시도도 보인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밤에 피는 꽃’은 추리적 요소와 멜로까지 다양한 맛이 좋고, ‘세작’은 정치물과 멜로물이 섞여 색다르다”고 했다.
연기에 대한 호평도 쏟아진다. ‘세작’에서 조정석은 1~4회 단 네편에서 왕을 향한 충심과 자신을 믿지 못하는 왕에 대한 슬픔, 분노 등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했다. ‘밤에 피는 꽃’에서 이하늬는 전매특허인 코미디 연기를 사극에서도 튀지 않게 소화했다. 정 평론가는 “이하늬는 배우 자신의 매력으로 캐릭터의 매력을 배가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됐고, 조정석은 코미디부터 흑화된 카리스마까지 연기 영역을 확장했다”고 짚었다.
그러나 ‘환상연가’는 설정이 흥미롭다는 것 외에는 완성도가 다소 아쉽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윤 교수는 “이중인격이라는 현대적 요소를 사극에 접목한 점은 흥미롭지만 캐릭터와 에피소드가 복잡한 것에 비해 연기와 연출이 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극적 몰입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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