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김석범, 켄 로치…비관, 희망, 사랑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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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18일 타계한 재일 디아스포라 논객 서경식의 마지막 유작 '나의 미국 인문 기행'(2024.1)을 펼쳐보았다.
20세기 역사, 진보와 반동·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던 그 파란만장한 여정을 오래 지켜본 두 거장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들은 생의 마지막까지 창작의 열정을 불 지피며 이 험난한 시대를 응시하고 간절한 태도로 다시 사랑과 희망을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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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우 | 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지난해 12월18일 타계한 재일 디아스포라 논객 서경식의 마지막 유작 ‘나의 미국 인문 기행’(2024.1)을 펼쳐보았다. 정직한 비관주의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그의 세계 인식은 이 책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서경식은 세계가 지금보다 더 좋아지리라는 기대가 사라진 이 시대 현실을 ‘유토피아의 폐허’라고 칭한다. 코로나 시기 3년과 두곳의 전쟁을 응시하며 그는 한층 세계에 대한 비관에 빠진다. 그가 보기에 지금 우리는 ‘이상이 사라진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서경식은 “이 폐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 어떻게든 파괴된 이상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라고 절박하게 되묻는다. 이런 질문은 이 시대 한국사회에 그대로 투사될 수 있으리라. 어느 순간부터 지금보다 더 좋아지리라는 기대와 희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인간은 희망 없이는 삶을 유지하기 힘든 존재이다. 미래에 대한 비관과 퇴행의 감각이 공기처럼 떠도는 우울한 현실 속에서 희망은 어떻게 찾아질 수 있을까.
이즈음 자신의 분야에서 기념비적 성취를 이룬 두 노(老)거장을 통해 희망을 향한 필사적인 모색을 만났다. 대하소설 ‘화산도’를 쓴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올해 99살이다. 그는 최근 일본 문예지 ‘스바루’(2024.2)에 단편소설 ‘명순과 기준’을 발표했다. 두 인물은 김석범이 1957년 발표한 ‘간수 박서방’과 ‘까마귀의 죽음’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두편의 소설은 김석범의 기나긴 문학적 여정의 기원이자, 제주4·3의 참담한 비극을 일본 사회에 일깨운 문제작이다.
‘명순과 기준’에서 두사람은 애타게 사랑하는 팔촌 남매 사이로 설정되며 서로를 향한 도저한 그리움과 애틋한 관계가 시적으로 펼쳐진다. 김석범은 이 작품을 통해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한다. “말과 말이 부딪쳐 하나가 되어 사랑이 태어났다”는 문장은 작가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세상에 전하고자 했던 전언일 테다. 노작가의 경이로운 분투 그 자체가 희망으로 다가온다.
99살 작가 김석범의 비범한 열정은 올해 88살이 된 켄 로치 감독의 태도와 포개진다. 최근 개봉된 ‘나의 올드 오크’는 그가 자신의 마지막 영화라고 부른 작품이다. 영국 북동부 한 마을을 배경으로 시리아 난민과 폐광촌에 남은 사람들의 갈등, 공감과 연대를 묘사한 이 영화는 희망이 사라진 사회에서 다시 힘겹게 희망을 찾는 사람들의 얘기다. 켄 로치는 한국의 관객에게 서로 분열되고 적대감을 품게 된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며 희망을 모색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20세기 역사, 진보와 반동·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던 그 파란만장한 여정을 오래 지켜본 두 거장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들은 생의 마지막까지 창작의 열정을 불 지피며 이 험난한 시대를 응시하고 간절한 태도로 다시 사랑과 희망을 얘기한다. 서경식의 표현을 변주하자면, 두 거장 생애 말년의 고투는 ‘추락해가는 세계를 향한 고요한 저항의 외침이자 사랑의 호소’가 아닐까. 그는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의 맺음말에서 “나는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세계 여기저기에서 하루하루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의 작은 조각이라도 제시하여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적었다. 김석범과 켄 로치도 바로 이런 마음이었지 싶다. 누구보다도 절망과 모순을 치열하게 통과했기에, 이들이 말하는 희망과 저항은 커다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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