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깬’ 박민영·나인우, ‘고쳐 못쓸’ 이이경·송하윤 응징 ‘통쾌’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다.
tvN 월화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강지원(박민영 분)은 알 속에 갇힌 여자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바람 나 집 나간 엄마가 있었지만 상처가 되진 않았다. 그 공백을 두 배 이상의 사랑으로 메꿔주던 아빠(정석용 분)가 있었으니. 덕분에 다정하고 웃음 많은 소녀로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학창시절은 그녀를 주눅 들게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친구들의 적의 속에 고립됐다. 웃음을 잃었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친구 정수민(송하윤 분)이 있어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다.
스물 세 살 때 아버지마저 여읜 후론 의지가지없는 처지가 됐다. 그나마 다행히 대기업 U&K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직장생활이 편편하진 않았다. 열심히 일은 하지만 무능한 주제에 마케팅 상무의 사돈에 팔촌 친구의 동생이라며 정치질만 일삼는 김경욱(김중희 분)의 괄시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움츠러들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곳에서 남자친구 박민환(이이경 분)을 만났다는 점. ‘니 주제에 나를 만난 건 행운’이란 말버릇이 고약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숨구멍은 틔워주었다. 사원 추천의 기회가 있어 유일한 친구 정수민을 계약직으로 꽂아줄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박민환과의 결혼은 의미가 있었다. 아버지 사후 잃었던 가족을 회복하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고된 시집살이에 더해 박민환마저 직장을 때려치고 기생하는 바람에 누적된 스트레스가 암을 불렀다.
그리고 요양병원 병원비 체납 이유를 확인하러 집을 찾은 날 목격했다. 한 침대 위에 누워있는 박민환과 정수민을. 그들은 희희낙락 강지원의 사망보험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남편 박민환 손에 살해당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10년 전으로 돌아온 강지원은 혼란스럽다. 끊임없이 자신을 가스라이팅 해 온 박민환·정수민과 한 사무실안에서 호흡하는 일은 끔찍했다. 달라진 것 한 가지는 지난 삶에서 무관했던 유지혁(나인우 분) 부장이 그녀 주변을 맴돈다는 것.
유지혁도 10년 세월을 거슬러 돌아온 인물이다. 입대 앞둔 술자리 끝에 꽐라가 된 강지원을 만났었다. 늑대같은 무리들이 걱정되어 그녀 곁을 지켰다.
여자는 외로워 보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3개월 전에 혼자 남은 가족인 아버지를 여의었고 유일한 절친에게 눈 돌아간 남친과는 결별했단다. 여자는 매일매일 배를 타는 기분이라고 했다. 계속 흔들려 불안하다고, 그래서 땅을 딛고 싶은데 그 땅이 수민이란 친구밖에 없단다.
여자의 외로움이 전염돼 자기 얘기도 꺼냈다. 1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출발한 아버지마저 이복동생만 남겨놓고 떠났다는 얘기를 했을 때 여자로부터 찌질하단 핀잔을 들었다.
다시 본 여자는 어미 잃은 새끼고양이를 돌보고 있었다. 제대하도록 휴가때마다 캠퍼스의 새끼고양이를 찾았던 건 여자 때문이었다.
복학했을 때 여자는 졸업했고, 사라졌던 그 여자를 다시 본 건 할아버지 회사에 부장으로 입사하고서였다. 여자는 부서의 천덕꾸러기였고 박민환과 사내연애 중이었다. 여자는 박민환과 결국 결혼했고 불행하게 살다 죽었다.
그녀를 봉안한 날 차 고장으로 탄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제 마음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지켜주기라도 했겠죠. 기회가 있다면 확실히 잡을 겁니다.”
그리고 차 사고로 죽고 깨어나 보니 10년 전. 강지원과의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이번엔 반드시 지킬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지난 생의 관성, 지난 생에서 획득한 품성을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녔다. 어머니 사후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유지혁에게 할아버지(문성근 분)의 사랑은 여전히 강요로 느껴졌고 꾸밈없이 해맑은 이복 여동생 유희연(최규리 분)은 여전히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다. 그런가하면 강지원은 다시 살면서도 정수민을 거절 못했고 박민환의 파쇼에 휘둘렸다.
다행히 서로가 서로의 도움이 되었다. 혼자인 게 얼마나 슬픈 일인 지를 알려준 강지원 덕에 유지혁은 할아버지의 사랑과 여동생의 사랑스러움에 눈을 떴고 착하고 순한 영혼 강지원은 유지혁이 도와주었다. “(강지원의) 땅이 되고 싶다”던 유지혁은 강지원에게 흔들리지 않는 토대가 되어 지원의 알깨기를 도왔다. 말 그대로 줄탁동시(啐啄同時).
어쨌거나 강지원의 D데이는 박민환 부모와의 상견례날로 잡혔다. 아버지 제사를 혼자 지내왔다는 지원의 말에 딸은 제사 지내는 것 아니라며 “아버님도 내가 딸 둔 죄인이다 생각하시고 다 이해하실 거야.”라는 민환 모(정경순 분)의 말이 버튼을 눌렀다. “제가 이해 못하겠는데요. 아줌마”라 말문을 연 지원은 “나 이 결혼 엎을 거예요. 정신차려요. 아줌마. 당신 아들 그렇게 안 잘났어.”
박차고 나선 길을 막는 박민환은 유지혁에게 배운 업어치기로 메쳐버렸다. 회사에서도 따져드는 박민환에게 연거푸 따귀를 날리고는 여자 팬티를 박민환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어디서 바람난 새끼가 큰 소리야!”
중인환시리에 벌어진 이 스캔들은 U&K를 휩쓸고 박민환은 물론 정수민까지 사면초가로 내몰았다.
박민환도 정수민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한없이 착했던 강지원이다. 끊임없이 양보하고 눈만 부라려도 주눅드는 것이 마땅했던 강지원이다. 그나마 박민환은 강지원과는 끝이란 정도의 상황파악은 한다. 하지만 정수민은 임신이란 거짓말까지 앞세워 강지원의 동정을 사려한다.
정수민의 이 기가 막힌 발상은 박민환마저 실소하게 만든다. 친구의 남친을 꾀어 임신해 놓고 당사자인 그 친구에게 동정받을 수 있으리란 해괴한 믿음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계약해지된 데 이어 영원한 호구 강지원마저 잃은 정수민도 죽을 맛이지만 강지원만 믿고 사채까지 끌어 쓴 박민환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신체 훼손의 위협까지 받는 상황을 모면하려면 부모 도움이 절실한데 엄마 김자옥 여사는 애 안고 오기 전엔 어림없단다. 그러니 박민환의 유일한 구명줄은 임신했다는 정수민뿐.
직장 잃고 호구 잃어 새 보금자리가 필요한 정수민과, 몸 성히 살고 싶은 박민환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졌다. 드디어 강지원은 치우고 싶었던 인생의 쓰레기 둘을 한 타령으로 치워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 옛말처럼 이 둘은 치사찬란한 쓰레기 인성질을 남발하며 서로를 생지옥으로 끌어내릴 모양이다.
이제 문제는 예정된 유지혁의 죽음. 강지원과 유지혁의 경험상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다만 상대를 바꿀 수는 있다. 커피포트에 데었던 강지원의 흉터는 대신 나서준 유지혁에게 옮겨갔다. 예식장 박민환의 옆 자리엔 강지원 대신 정수민이 서게 됐다. 하지만 유지혁의 죽음은?
누굴 대신 시킬 수도 없는 그 엄중한 문제는 남겨진 드라마의 숙제다. 유쾌한 복수극 ‘내 남편과 결혼해줘’가 과연 끝까지 유쾌하게 매조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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