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알고 있다, 우리 안의 증오와 혐오 [이형석의 불편한 편집숍]

2024. 1. 3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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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말고 입양하세요” “입양하지 말고 사세요”

며칠에 걸친 고민 끝에 얼마 전 고양이를 집에 들였다. 반려묘를 키우기로 결심을 하고 나니 생각해야할 게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반려동물은 처음이라 더 조심스럽고 어려웠다. 당장 어떤 고양이를 어떻게 들일지 막막했다.

‘주위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쯤 얻는 거 어렵지 않겠지, 아니면 유기묘를 입양하면 되고’. 이렇게 쉽게 생각했던 배경에는 이젠 전국민이 다 알고 있을 유기동물 입양 캠페인 모토 ‘사지말고 입양하세요’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격적인 수소문과 폭풍 검색에 나섰다. 알면 알수록 요지경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그 유명한 고양이, 웃음만 남기고 사라진 체셔캣을 만난 기분이랄까. ‘반려묘 생태계’라 할만한 그곳엔 내가 모르던 또 하나의 세상이 있었다. 초보 반려동물 양육자에겐 이상하기만 한 나라. 온라인에서 다양한 사이트와 커뮤니티를 찾아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검색을 하고 나면, 앨리스처럼 “내가 본 것이 고양이였던가”(Was it a cat I saw?)라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고양이의 이야기, 인간의 서사

일단 고양이를 입양할 것인가, ‘구입’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묘주되기 첫번째 관문이었다. 초보 양육자에겐 ‘입양하지 말고 사라’는 권유도 적지 않았다. 유기묘의 경우 건강상태와 사람과의 친화력을 파악하기 어렵거나 초보 양육자가 감당할 수준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기묘를 키우기로 결정할 경우, 파양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하는 만큼 더 신중해야 했다. 버려진 생명체를 거둬 키우는 ‘선한마음’을 스스로 배신할 수 밖에 없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언제든지 맞딱뜨릴 수도 있다.

보통 ‘(비용을 내고) 분양을 받는다’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 즉 전문판매자에게서 반려동물을 구입하기로 결정한다고 해도 쉬운 것은 없다. 무엇보다 먼저 가족으로 맞아들여 평생 같이 할 존재를 돈을 주고 산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일종의 죄책감, 심리적 저항감을 극복해야 한다. 만일 반려동물 구입을 결정했다면 가족이 될 수도 있는 존재를 앞에 두고 “이거 얼마에요?” “비싸니 깎아주세요” 같은 흥정과 거래를 해야 하는 불편함을 거듭 겪어야 한다. 물론 “이 아이는 어느 정도에 분양받을 수 있을까요?” “저에게는 (가격이) 좀 부담이 되는군요” 따위의, 반려동물은 전혀 알아먹지도 알아주지 않을 ‘완곡 어법’을 쓰겠지만 말이다. 이럴 때 반려동물이란 상품으로 구입해 가족으로 맞이하는 존재다.

그렇다고 유기동물을 입양할 때 마음이 마냥 편한 것도 아니다. 그 나름대로의 심리적 불편함이 있다. 유기동물 입양을 홍보하는 인터넷 사이트나 휴대폰 앱에 올라온 사진을 살펴보다 보면 어느새 ‘더 예쁘고, 더 어리며, 더 건강한’ 개체를 찾아 무한 클릭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지상정’이라고 위안해보지만, 외모나 건강 때문에 입양되지 않고 자연사나 안락사로 ‘종료’된 유기동물을 보면 마음이 안 좋다(유기동물 입양홍보 앱에선 자연사나 안락사를 ‘종료’라고 표현한다). 더 귀엽고 더 깨끗한 개체일수록 입양 홍보 글에 달리는 댓글이 많다. 입양 신청 마감도 금방 된다. 반면 병·장애가 있거나 나이가 많거나 별 특징없는 외모를 가진 유기동물들은 ‘댓글 0’으로 ‘종료’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버려진 생명체를 향한 연민에도 외모나 건강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 것은 아닌지 문득문득 자괴감이 든다.

생전 처음 고양이를 들이면서 알게된, 일종의 ‘반려묘 생태계’라 할만한 세상은, 엄격하게 관리되고 고가에 거래되는 고급 품종묘와, 입양을 기다리다 운 나쁘면 비참한 죽음을 맞는 유기묘가 양극단을 이루고 있었다.

인간들은 고양이를 사거나 팔거나, 기르거나 버리거나, 구조하거나 종료시키며 반려묘 생태계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개입은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인간의 서사’로 만들었다. 인간과 고양이 사이의 교감과 공존의 서사 한편에 인간끼리의 혐오와 증오·배제·차별의 언어로 얼룩진 말들이 난무한다. 고양이를 기르는 일을 두고 인간들끼리 내가 맞느니 네가 맞느니 반목을 거듭하다 혐오와 증오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기묘하게도 그 양상은 우리 사회 전체 갈등의 축소판이다. 거울상이라고 할만큼 정치적 극단주의와 닮아있기도 하다. 야당 당대표를 칼로 찌르고, 여당 의원을 돌로 친 극단주의와 혐오주의가, 정치와는 영 거리가 멀기만 한 것 같은 고양이들의 세상에까지 침범한 것이다.

‘유기묘 먼저’ vs ‘품종묘가 최고’

고양이를 키우거나 고양이를 키우려고 하는 이들 대부분은 입양을 하든 구입을 하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형편과 취향에 따라 결정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순혈 품종묘든, 몇 가지 종이 교배된 ‘믹스묘’든, 외국 혈통 종이든 토종묘든 크게 개의치도 않는다. 어떤 외모와 특징의 고양이를 선택할 것인지는 묘주 각자의 기호대로 하면 되고, 사람 잘 따르고 건강한 개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길고양이에 대한 대처와 이른바 ‘캣맘’(길고양이에 먹이와 서식처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놓고 빚어진 논란과 논쟁이 극단화된 경향을 낳았다. 한편엔 ‘캣맘’이 있고, 또 다른 편엔 ‘캣맘혐오’가 있다. 한쪽에선 품종묘가 최고라고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선 유기묘부터 입양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온·오프라인에서 정리된 여러 의견을 종합해보면 인간이 기를 수 있는 고양이는, 개체수가 가장 많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다양한 모양·특징의 토종묘(도메스틱 숏헤어)와 여러 종이 교배돼 나온 ‘믹스묘’, 그리고 인위적으로 개발돼 혈통이 관리되는 소수의 품종묘로 나뉜다. 또 집에서 기르는 집고양이가 있고, 주인이 없는 길고양이가 있다. 길고양이는 사람이 기르다가 버린 유기묘와 아예 한번도 사람 손길을 타지 않은 야생고양이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길고양이에게 먹이와 은신처를 제공하는 이들 중 일부가 무리한 급식이나 불법적인 은신처 제공, 무분별한 구조에 나서면서 논란이 됐다. 이들에 대한 비판이 일각에선 캣맘 전체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번졌다.

캣맘혐오론자들은 길고양이나 유기묘에 대한 무분별한 급식이나 구조가 생태계를 망가뜨린다고 비판한다. 극단적으로는 개인 각자가 양육하지 못할 길고양이나 유기묘라면 급식·구조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또 일부 캣맘들은 유기묘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을 다른 이들에게도 강요하면서도 정작 길고양이 중 외모가 예쁘거나 품종이 좋아 보이는 개체는 먼저 입양을 한다고 비판받는다. 위선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소유지가 아닌 곳에 길고양이의 먹이나 은신처를 두는 사람들의 행위도 민폐로 지적을 받는다.

캣맘혐오론자들 일부는 품종묘 지상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길고양이나 토종묘들은 버려지거나 마구잡이로 번식한 개체들에 의해 확산됐으므로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책임하에 입양하지 않고 야생묘일지 유기묘일지 모를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나 은신처를 제공하는 행위, 인위적으로 구조해 보호하는 일은 유전적으로 열등한 종과 개체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아 생태계를 망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또 다른 한편에는 무엇보다 ‘동물권’과 ‘생명중시’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인간과 동물의 공존이라는 가치를 위해선 길거리에 버려진 생명체,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매일을 살아가는 존재를 외면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에선 값을 매겨 반려동물을 돈으로 거래하고, 한편에선 마음에 안든다고 버리는 인간의 탐욕과 이중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구미’에 맞도록 반려동물의 품종을 개발하고, ‘번식공장’을 통해 인위적으로 유통시키는 일이야말로 생태계를 위협하는 비윤리적 행위라는 지적이다. 펫숍이나 전문판매업자 등을 통해 반려동물을 구입하는 일은 이를 더 부추길 수 있다는 말이다.

반려묘 생태계에서 마주한 우리 사회의 단면

‘동물권’의 범위를 얼마만큼으로 정할 것이냐, 유기묘나 길고양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 학대 없는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반려동물의 공급과 유통은 가능할까,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위해 인간의 개입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등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오고 있는 문제이며,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통해 풀어야 할 숙제다.

그런데, 최근 각종 반려동물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나 사이트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들이 극단적으로 충돌·대립하는 경향들이 나타나 우려를 사고 있다. 상대를 혐오·증오하는 욕설, 새로운 속어나 조어들도 많다. 혐오와 증오가 확대되며 일부의 일탈이나 범죄행위로 연결되기도 한다.

양극화된 정치적 논쟁 구도와 비슷한 양상도 띤다. 한편의 의견은 능력·경쟁·자유방임주의와, 또 다른 쪽은 평등·연대·보편주의적 시각과 닮아 있다. 종종 의견대립이 남녀갈등이나 세대문제로 번지기도 한다. 게시글에 남혐, 여혐, 나이비하 등이 적지 않게 눈에 띈다.

마치 ‘인종주의’를 동물에 적용시킨 듯한 주장도 있다. 반려동물을 혈통과 외모·건강에 따라 등급화·서열화하는 ‘변종 우생학’이라 할만하다. 그렇다고 특정한 품종이나 외모를 선호하는 반려동물 양육자가 ‘우생학 지지자’라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단지 개인 취향의 문제다. 그런데 특정 품종이나 외모의 반려동물을 좋아하거나 키운다고 해서, 유기동물을 입양하지 않고 전문판매업자에 구매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퍼붓는 또 다른 극단의 사람들도 있다.

‘묘주’라고 할까, ‘집사’라고 할까. ‘암컷·수컷’이라고 할까, ‘여아·남아’라고 할까. 반려동물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문화와 세계를 접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고민과 언어에 눈뜨게 되고, 나와 다른 취향과 감각, 주장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름’에 대한 인식이 배제나 차별, 혐오와 증오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반려묘를 들이게 되면서 마주한 또 하나의 세상 한편엔 어디선가 많이 봐왔던 날선 극단의 언어들, 정치 논쟁에서 익숙했던, 서로를 죽이려는 흉기같은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민낯이었다.

튀르키예계 독일 저널리스트 퀴브라 귀미샤이는 저서 ‘언어와 존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전 사회적으로 증오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 혐오를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이를 용인해서도, 토론에서 새로운 자극제가 되는 ‘의견’으로 격상시켜서도 안 되며, 인종주의, 극단주의, 인간혐오라고 해야 한다. 증오는 의견이 아니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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