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 현실과 싸우는 소설가… 이번엔 외계문어와 맞서다

박세희 기자 2024. 1. 3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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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의 한 건물 안, 복도를 꽉 채우는 크기의 거대 문어가 등장해 빨판투성이 다리를 굼실거리며 말을 건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그런 문어의 대가리를 휴대폰으로 가격해 쓰러뜨린 이는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의 위원장이다.

갑자기 거대 문어가 나타나고 수산물 가게 수조 속의 대게가 러시아어로 말을 거는 등 정 작가만의 기발한 상상력에서 탄생한 이야기들을 읽노라면 절로 웃음이 터지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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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정보라 작가
첫 자전적 SF 연작소설집 내놔
농성 중 만난 남편 얘기도 소재
거대 문어·러시아어 하는 대게…
기상천외하고 발랄한 이야기 속
비정규직 강사 해고 등 현실다뤄
소설가 정보라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연작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경북 포항의 바다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에 의해 고통받는 고래, 수온이 높아져 급속히 개체 수가 늘어난 해파리 등의 이야기는 해양 생태계가 파괴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인플루엔셜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대학교의 한 건물 안, 복도를 꽉 채우는 크기의 거대 문어가 등장해 빨판투성이 다리를 굼실거리며 말을 건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그런 문어의 대가리를 휴대폰으로 가격해 쓰러뜨린 이는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의 위원장이다. 항복은 무슨, “문어숙회를 해주겠다”는 그는 안쪽을 뒤집어 자르고 내장을 떼어내며 문어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저주토끼’로 영국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가 자전적 내용을 담은 첫 연작소설집을 내놨다. 신간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래빗홀)다.

팬데믹 이후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들을 대량으로 해고한 사태를 배경으로, 농성장을 홀로 지키던 노조위원장이 거대 문어를 만난 이후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고 있는 첫 번째 단편소설 ‘문어’는 대학 강사에 대한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데모를 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정 작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실제로 ‘문어’의 초반 5∼6쪽은 2021년 모 대학교 농성장에서 쓰였다. 물론 말을 하는 거대한 문어를 만났다는 설정은 상상이다.

작가는 소설집과 함께 발간된 소책자 속에 담긴 편집자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남편이 된 옛 위원장님하고 연애할 때 그가 바다생물을 멸종시킬 기세로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외계인이 쳐들어오더라도 문어같이 생겼으면 그냥 먹어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외계 문어를 먹는 이야기를 썼다”고 말했다.

책은 ‘대게’와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와 같은 각종 해양생물을 소재로 이어진다. 마치 ‘해양생물 연작소설’ 같다. 갑자기 거대 문어가 나타나고 수산물 가게 수조 속의 대게가 러시아어로 말을 거는 등 정 작가만의 기발한 상상력에서 탄생한 이야기들을 읽노라면 절로 웃음이 터지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인간에 의해 고통받는 고래, 지구온난화로 급속히 개체 수가 늘어난 해파리 등은 해양 생태계 파괴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작가 역시 처음부터 바다나 환경 문제에 큰 관심이 있진 않았다고 한다. 죽도시장에서 한평생 가게를 해온 시어머니와 경북 지역 산업 단지의 노동조합 상근자로 일하고 있는 남편과 함께 포항에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관심이 커졌다. 소설 ‘대게’에서 나는 “내가 아무리 플라스틱을 적게 쓰고 분리수거를 열심히 해도 바다에 방사능 오염 물질을 국가 단위로 쏟아붓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며 눈물을 흘린다. 여기에 남편은 “그러니까 싸워야죠”라고 중얼거린다.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건 아니”라면서. 그러면서 덧붙인다. “안 싸울 수는 없죠. 열 받으니까.”

소설집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일방적 해고 처분과 작은 나라의 이권을 호시탐탐 노리는 21세기 제국주의 등 맞서 싸워야 하는 수많은 문제도 함께 수면 위로 끌어낸다. 열 받으니 싸울 수밖에 없다는 이들은 항복하지 않는다. 저항하고 맞선다.

온갖 부조리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 수시로 데모 현장에 다니는 ‘싸우는 소설가’ 정보라를 보다 가까이 느끼게 하는 책이다. 기상천외하고 발랄한 이야기 속,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작가의 진심이 엿보인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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