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잘 알겠다"…법원 "의례적 공감, 재판 개입 의도 아냐"

유영규 기자 2024. 1. 3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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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사법농단' 사건 1심 재판부가 일부 재판 개입이나 행정부와의 재판 관련 협의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를 엄밀히 적용해야 한다는 해석에 따라 양 전 대법원장 등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지난 26일 4시간 27분 동안 선고공판을 진행한 재판부는 A4 용지 기준으로 3천160쪽, 두께 34.5cm에 달하는 전례를 찾기 힘든 방대한 판결문에서 양 전 대법원장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없는 이유를 가득 채웠습니다.

어제(30일) 법조계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의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이종민 임정택 민소영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검찰이 제시한 사실관계 일부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취지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일단 2014∼2016년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이 대법원 재상고심에 올라가자 청와대와 외교부, 법원행정처,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머리를 맞대 논의한 점을 인정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김앤장 송무팀을 이끈 한상호 변호사와 2015년 5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3차례 사석에서 만나 사실상 협의 사실을 인지했다는 내용을 판결문에 담았습니다.

검찰은 당시 피해자 승소 판결을 재상고심에서 뒤집기 위해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이를 위해 외교부가 일본 기업에 유리한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하도록 하는 전략이 추진됐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외교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김앤장에서 외교부에 의견서 제출을 촉구해달라'고 한 변호사에게 요청했다는 것이 검찰의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한 변호사가 양 전 대법원장을 만나 전략을 재확인하면서 서면을 제출하겠다고 말하자 양 전 대법원장은 "그러냐, 잘 알겠다"고 말하며 이를 인지 혹은 승인했다고 검찰은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당시 반응이 '변호사가 법관에게 사건 이야기를 하면 건성으로 얼버무리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는 뜻'이라는 양 전 대법원장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대법원에서 이 사건의 진행 상황은 전원합의체 회부 논의를 할 정도가 아니었고, 양 전 대법원장에게는 회부할 권한이 없었다는 점도 재판부는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2015년 11월 양 전 대원장이 한 변호사를 만난 자리에 대해서는 검찰의 주장처럼 양 전 대법원장이 '번복 시나리오'를 적극적으로 전달했다고 보기 어렵고, 실제로는 한 변호사가 먼저 꺼낸 말에 대해 사적인 친분을 기반으로 한 의례적인 공감 표시 정도를 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판결문에는 임종헌 전 차장이 김앤장, 외교부, 청와대와 수시로 연락하며 이 의견서를 제출하는 방안을 논의했고, 특히 조태열 현 외교부 장관(당시 외교부 2차관)이 임 전 차장을 만났다는 사실도 담겼습니다.

그러나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양 전 대법원장의 공모를 인정할 수 없다고 재판부는 봤습니다.

법원행정처가 이른바 '물의 야기 법관 보고서'를 작성해 특정 법관에게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혐의에 대해서 재판부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에도 해당 보고서가 확인된다"며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인사총괄심의관실은 매년 2월 법관 정기 인사에 대비해 양 전 대법원장 임기 전부터 해당 문건을 지속해서 작성해왔고, 이는 법원행정처 차장 정도 직급자의 구체적 지시 없이 심의관의 재량이 폭넓게 인정돼 작성돼 왔다고 재판부는 지적했습니다.

특히 부적절한 재판 진행이나 이른바 '튀는 판결'을 하면서 사법행정에 부담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법관을 물의 야기 법관으로 선별했다고 보이지도 않으며, 반드시 인사 조처가 따라오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문건은 인사권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전보 인사에 대한 정책 결정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하급자 스스로 작성한 것이며, 변칙적인 징계나 문책 수단 목적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보고서에 오른 법관 한 명 한 명의 당시 행위를 거론하면서 "법관이 공개적으로 특정 정당 정치인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는 것은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저해하고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양 전 대법원장이 'V' 표시로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는 행위에 대해서는 "비위 행위에 대해 징계 처분 없이 인사 결정에 고려하는 것은 적법한 사법행정권 행사"라며 "징계권이나 인사권을 행사할 것인지는 대법원장의 재량 판단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2016년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의 ▲ 부산고법 판사 비위 은폐 사건 ▲ 매립지 귀속 분쟁 사건 ▲ 서울남부지법 위헌제청 결정 재결정 의견 전달 등에서 '재판 개입'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부산고법 판사 비위 은폐 사건에 대해서는 "부적절한 재판 개입을 요청한 행위"라고 판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선고 연기 요청이 재판장에게 구체적으로 전달되지 않았고, 전달됐더라도 고 전 대법관에게 재판에 관여할 일반적 직무권한이 없다며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당시 재판장이 부담을 느낀 바 없다는 증언도 근거가 됐습니다.

매립지 귀속 분쟁 사건도 재판부는 고 전 대법관이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보고를 통해 헌법재판소와 중복 심리하게 된 이 사건 일부를 조기 선고하도록 재판에 개입했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 전 대법관에게는 그러한 직무가 없어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판결문 앞부분에서 61쪽에 걸쳐 직권남용죄의 법리와 사법행정권의 한계, 대법관·각급 법원장·수석부장판사·재판연구관·개별 법관의 직무 권한 등 판단론을 제시했습니다.

권한이 없으니 남용이 없다는 취지입니다.

(사진=연합뉴스)

유영규 기자 sbsnewmedi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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