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바다의 전쟁, 인플레 재발로 치달을까?

이종태 기자 2024. 1. 31.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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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서부 지역을 통치하는 후티 반군이 홍해의 통항을 방해하고 있다.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무력 개입에 나섰으나 보복의 악순환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2023년 12월5일, 예멘 해안의 후티 병사들 사이로 지난해 11월 나포된 ‘갤럭시 리더’호가 보인다.ⓒREUTERS

‘홍해-수에즈운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장 인기 있는 바닷길이다. 동아시아에서 출발하는 선박의 경우, 일단 인도양으로 나간 뒤 아라비아반도 쪽으로 북상하다 보면 바다가 점점 좁아지다가 바브엘만데브 해협에 이르게 된다(〈그림〉 참조).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반도 사이의 이 해협은 홍해로 들어가는 좁은 문이다. 길고 좁은 회랑 같은 홍해를 거슬러 올라가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면 지중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동쪽으로 항해하면 이스라엘과 레바논·시리아, 서쪽으로는 그리스와 이탈리아·프랑스의 항구들에 닿는다.

19세기 중반 수에즈운하가 완공된 이후 홍해는 아시아-유럽 항로를 혁신적으로 단축한 바닷길로 각광받았다. 현재 컨테이너선(직사각형 형태의 큰 수송 용기인 컨테이너로 상품을 나르는 화물선)의 글로벌 교통량 가운데 30% 정도가 이 바닷길을 이용한다. 홍해가 막히면 선박은 서쪽으로 더 나아가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우회해야 유럽에 이를 수 있다. 이 바닷길이 최근 위기에 봉착했다.

‘후티 반군(Houthi rebels)’이라는 무장 세력이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동쪽 육상(예멘)에서 화물선들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중순, ‘갤럭시 리더’라는 화물선을 나포한 이후 미사일과 드론을 상업용 선박들에 쏘고 있다. 1월 중순까지 공격 횟수가 30여 차례에 달한다. 홍해 통과 화물선들이 과거 가장 두려워한 대상은 소말리아 해적이었다. 지금은 후티 반군이다.

후티의 대변인 모하메드 압둘살람은 아랍권 최대 언론인 〈알자지라〉에 이 공격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연계 선박을 공격함으로써 서방국가들에 ‘전쟁 종식’을 압박한다는 명분이다.

‘후티(Houthi, 신을 따르는 자)’는 예멘(아라비아반도 서남단의 국가)의 서부(수도 ‘사나’를 포괄) 및 북부 일부 지역을 사실상 통치하는 정치‧종교‧군사 세력이다. ‘반군’이라면 연상하게 되는, 소규모 게릴라 조직이 아니다. 이슬람 시아파인 후티는 레바논 헤즈볼라, 이라크 서부의 무장 정파, 시리아 정부군 등과 함께 이 종파의 맹주국인 이란의 후원을 받는다. ‘이란의 대리인(proxy)’이라 불리는 이 세력들은 강경한 반미‧반이스라엘 노선을 고수해왔다.

후티는 1990년대에 결성되었으나 2014년 ‘예멘 내전’이 발발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그 이듬해(2015년)엔 수도 사나 등 서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승인된 예멘 정부를 동쪽 사막지대로 내쫓아버린다. 후티가 ‘반군(rebels)’으로 불리는 것은, ‘합법 정부를 내쫓고 정부를 참칭한다’는 의미다. 사우디아라비아(수니파 맹주)는 자국의 남쪽에 접경한 예멘에서 ‘이란의 대리인’이 날뛰는 사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쫓겨난 예멘 정부를 지원하는 아랍 연합군을 결성해 전쟁에 뛰어든다. 이로써 예멘 내전은 ‘사우디 대 이란’의 대리전 성격을 띠면서 장기화되었다. 예멘 주민들은 끔찍한 ‘인도주의적 위기’에 빠졌다. 유엔개발계획(UNDP)에 따르면, 2021년 한 해 동안만 이 전쟁의 직간접 결과(피살·기근·의료서비스 고갈 등)로 약 38만명이 사망했다.

2022년 봄,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후티와 사우디가 휴전 협상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2023년) 3월엔 사우디와 이란이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예멘 내전이 종식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서서히 형성되었다. 2023년 10월7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지역을 기습해 1200여 명(민간인이 다수)을 학살하고, 이에 맞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민간인 희생자 수가 2만명을 넘어서기 전까진 그랬다.

이런 와중에 지난해 11월, 후티가 ‘가자지구 전쟁 종식’을 내걸고 홍해의 화물선들을 타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방국가들은 분노했다. 후티는 단지 인근 바다의 통행을 방해할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방국가들은 이 공격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교란의 가능성에 경악했다. 미국이 지난 1월3일 영국·오스트레일리아·네덜란드·한국 등 13개 국가와 공동성명을 발표한 이유다. 후티가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미국으로서도 가자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인근 지역의 전쟁에 직접 휘말리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하는 경우 후티-사우디 평화협상(바이든 행정부가 꼽는 외교 성과)이 좌초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사실상 민간인 학살로 끓어오른 무슬림들의 분노는 정점에 달할 것이다. 중동의 반미‧반이스라엘 세력이 단결하면서 이 지역 전반으로 전쟁이 확산될 수도 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재발로 이어질까?

후티는 서방국가들의 성명 발표에 굴하지 않았다. 〈알자지라〉가 예멘의 친(親)후티 매체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1월5일 수도 사나에서 열린 반미 집회에 군중 수백만 명이 모여 결전 의지를 다졌다. 후티는 신병 모집은커녕 병사들에게 생계비를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홍해 공격으로, 장기화된 전쟁과 경제난에 지칠 대로 지친 예멘인들을 다시 ‘반미의 열정’ 아래 집결시켰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후티는 홍해 공격 이후 불과 몇 주 동안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위해 싸우려는 열망으로 부푼 수만 명 규모의 신병을 모집했다”. 후티는 쫓겨난 예멘 정부의 근거지인 마리브 주변에 5만명 규모의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후티가 평화협상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1월11일, 미국과 영국은 후티에 대한 최후통첩을 실행에 옮겼다. 후티가 예멘 서부 지역에 배치한 ‘홍해 선박 공격 자산(지휘 거점, 군수품 창고, 미사일 및 드론 발사 시스템, 방공 레이더 등)’이 타격 대상이었다. 육상과 해상, 잠수함에서 일제히 후티를 공격했다. 그러나 후티 측은 오히려 공격 대상을 ‘이스라엘 연계 선박’에서 ‘미국 선박’으로까지 확대하겠다고 선언하며 1월13일부터 다시 홍해의 선박들을 공습하고 있다. 이에 미국이 반격하며 보복의 악순환이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미 주요 글로벌 해운사들은 홍해-수에즈운하 바닷길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해 유럽으로 들어가는 경로를 선택하고 있다. 해운사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운송 기간이 7~15일 늘어나고 운송비용도 추가된다. 테슬라의 독일 공장은 부품 조달의 지체로 1월 말부터 2주 정도 작업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이케아, 크록스 등 쟁쟁한 글로벌 소매업체들도 자사 제품의 배송 지연을 경고하고 나섰다.

문제는 이 사태가 장기화하거나 중동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경우다. 예멘 내전은 휴전하기는커녕 더욱 격렬해지고, 글로벌 공급망이 다시 혼란에 봉착하며, 석유와 가스 가격이 치솟을 수 있다. 이는 2022~2023년, 선진국 중앙은행들의 급속한 금리인상으로 그나마 기세가 꺾인 인플레이션에 다시 불을 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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