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의 ‘AI 반도체’ 공략…SK 다시 ‘딥체인지’를 꿈꾸다 [한양경제]

이승욱 기자 2024. 1. 3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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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의 미래SK]① ‘서든 데스’ 속 숨은 전략
‘AI 반도체’ 주축으로 시장 변화 따른 혁신 모색
계열간 시너지 확대 강조…“역량 결집 뒤 외부와 연대”

이 기사는 종합경제매체 한양경제 기사입니다

2024년 국내 기업의 ‘경영 화두’는 여전히 ‘불확실성’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 지속과 전쟁 위기 등 대외 변수가 여전히 상존하는 올해, 기업마다 ‘생존’과 ‘성장’을 향한 몸부림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국내 주요 대기업마다 불확실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변화와 혁신이 주요 어젠다(agenda)로 떠오르고 있다. 종합경제매체 ‘한양경제’는 국내 주요 대기업 총수들의 미래 전략을 전망하는 ‘연중기획’을 보도한다. 편집자주

SK그룹 제공

2024년 새해를 앞둔 지난 연말, 경제계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서든 데스’(sudden death) 발언이 주요 키워드로 다시 회자됐다. ‘돌연사’를 의미하는 서든 데스는 최 회장이 SK그룹뿐만 아니라 글로벌 불확실성의 위기 상황을 ‘절박’하면서도 ‘절묘’하게 표현한 키워드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앞선 지난해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SK그룹 주요 임원들이 참석해 열린 ‘CEO 세미나’에 참석해 “급격한 대외 환경 변화로 빠르고 확실하게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며 서든 데스를 언급했다.

■ ‘서든 데스’에서 녹아난 ‘딥체인지’ 의지

하지만 최 회장의 발언은 현 상황 진단에 머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가 제시한 키워드는 ‘미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위기 상황에서 근본적인 변화, 즉 ‘딥 체인지’(deep change)를 통해 새로운 조직과 전략을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실제 서든 데스 발언 후 진행된 그룹 인사에서 ‘인적 쇄신’이 두드러졌다. 주요 계열사를 이끌었던 ‘60대’ 부회장들은 2선으로 후퇴했고, ‘50대’ CEO들이 전진배치됐다. 7년 만에 다시 ‘서든 데스’를 언급하며 대대적인 쇄신 의지를 드러낸 결과다.

SK그룹 계열사 한 관계자는 “(최 회장이) 지난해 연말인사로 조직을 슬림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면서 “하지만 단순히 조직 슬림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그룹의 미래를 젊은 피의 수혈에 맞춰 적재적소에 기용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의 SK그룹은 올해 초 시가총액 기준 재계 2위 자리를 다시 탈환했다. 2022년 1월 LG에너지솔루션 상장으로 반사 이익을 본 LG그룹에 밀린 시가총액이 약 2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국내 대기업 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이는 SK그룹의 기업가치 상승은 근본적으로 SK하이닉스(옛 현대전자산업) 인수를 통한 딥 체인지 전략이 주효했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최 회장은 2012년 2월 SK텔레콤을 통해 SK하이닉스(옛 현대전자산업)를 인수했다. 지금에서야 ‘K-산업’ 성장 축으로 인정 받는 반도체지만, 당시만 해도 시장은 인수전에 뛰어든 SK그룹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최 회장은 당시 에너지·화학과 통신(SK텔레콤) 등 크게 2개 분야로 짠 그룹 포트폴리오가 지속적인 성장에 한계로 작용한다고 봤다. 업계에서는 주요 경영진의 반대에도 하이닉스 인수를 밀어붙이며 딥 체인지를 꾀한 그의 경영 스타일을 ‘뚝심 경영’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 반도체 분야 진출 뒤 12년…‘AI 반도체’로 혁신 꾀해

SK그룹 제공

최 회장의 SK하이닉스 인수는 SK그룹 차원의 두 번째 딥 체인지로 명명할 만하다. SK그룹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데는 위기 상황에서마다 미래 전략목표를 새롭게 제시하고 ‘깊은’ 변화를 꾀하며 큰 걸음을 옮겨 왔다.

SK그룹의 첫 번째 딥 체인지는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SK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기업 구조의 혁신을 이뤄냈다. 1953년 설립된 선경직물을 모체로 한 SK그룹은 이후 경공업(섬유)에서 중공업(석유화학)을 아우르며 수직계열화에 성공했지만 미래성장 동력에 대한 목마름은 컸다.

통신사업 진출이라는 첫 번째 딥 체인지를 통해 SK그룹은 지금의 글로벌 IT·테크 기업으로 변모하는 밑거름을 만든 셈이다.

최 회장이 체득한 딥 체인지의 경험은 그룹의 향후 명운을 가늠하는 생존 플랜이자 미래전략이다. 최 회장은 지금 AI(인공지능) 반도체 인프라 시장 공략과 그룹 내 협업 시너지 확대라는 두 축을 통해 세 번째 딥 체인지를 꾀하고 있다.

지난해 반도체 불황으로 급격한 변화를 격으면 업계는 딥 체인지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 회장이 반도체 부문 딥 체인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은 그의 2024년 첫 현장경영 방문지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최 회장은 지난 4일 SK하이닉스의 핵심 기지인 이천캠퍼스 연구개발(R&D)센터를 방문했다. 그는 이날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등 주요 경영진과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AI 메모리 분야 성장 동력과 올해 경영 방향을 점검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업황이 반등했지만 반도체 시장의 급격한 변화기에 대응하기 위한 차별화 전략을 독려하는 차원의 일정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최 회장은 당시 현장경영에서 “역사적으로 없었던 최근 시장 상황을 교훈 삼아 깊어지고 주기는 짧아진 사이클의 속도 변화에 맞춰 경영계획을 짜고 비즈니스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여러 관점에서 사이클과 비즈니스 예측 모델을 만들어 살펴야 한다”고 주문했다.

■ ‘AI 최적화’ 반도체로 승부…고객 맞춤형 전략 강조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최근 AI에 최적화된 고성능 반도체와 클라우드 서버를 거치지 않고 스마트 기기 자체에서 정보 수집과 연산이 가능한 온디바이스(On-device) AI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고성능으로 차별화되고, 고객에 따른 주문 맞춤형(ASIC) 공급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HBM은 챗GPT 등 생성형 AI 가속기에 적용되는 핵심 칩으로 평가받는다. SK하이닉스는 HBM, 프로세싱인메모리(PIM), 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 등에 집중하고 있는데, HBM 분야는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말 AI 인프라 조직을 신설하고 부문별로 흩어져 있던 HBM 역량과 기능을 결집한 ‘HBM비즈니스’를 신설했다. AI 진화로 파생하는 차세대 HBM 등 미래 시장을 개척하려는 포석이다.

관련 시장에서 수요는 폭증하고 있다.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이 올해 HBM 생산 능력을 2배 이상 증설해도, 엔비디아와 AMD 등 북미 클라우드 업체들의 AI 서버 신규 투자 확대를 따라잡기는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올 정도다.

고객사의 물량 선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미국 엔비디아는 HBM 확보를 위해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에 16억 달러 규모 선수금을 지급했다는 풍문이 전파될 정도로 시장 수요는 팽창하고 있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2021년 세계 최초로 4세대 HBM3 생산에 성공한 이후 지난해 2분기 HBM3(4세대) 양산을 시작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올해 2분기 HBM3E(5세대) 양산을 시작하며 잰걸음을 달리고 있다.

SK그룹은 온디바이스 AI 시장 개척에도 속도전을 낸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시장이 온디바이스 AI 보급 영향으로 올해를 ‘AI 도입 원년’을 설정하면서 향후 관련 메모리 반도체와 주문형 반도체의 신규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오는 3월 공개 예정인 애플의 AR(증강현실) 디바이스 ‘비전 프로’에 고대역스페셜 D램 공급을 시작으로 온디바이스 AI 메모리 시장에 진입한다.

AI 시장이 서버에서 엣지 디바이스인 스마트폰과 PC, 가전 등으로 확장하며 다변화와 서비스 확대 예상에 따른 대응이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최근 업황 보고서를 통해 “AI 메모리 반도체는 다양한 영역의 맞춤형 주문이 대부분을 차지해 향후 수주형 비즈니스로 변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SK하이닉스도 지난 25일 열린 2023년 4분기 실적 콘퍼런스 콜에서 “온디바이스 AI PC와 스마트폰은 메모리 반도체 수요를 촉발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며 “온디바이스 수요로 인해 기기당 메모리 탑재량이 증가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보였다.

최 회장은 “특정 제품군만 따지지 말고 매크로 상황을 파악해야 하고 마켓도 이제 월드마켓이 아니라 분화된 시장관점에서 살펴야 한다”며 “여러 관점에서 사이클과 비즈니스 예측 모델을 만들어 살펴야 한다”고 맞춤형 대응을 주문했다.

■ 계열사간 협력 시너지’ 부각되는 ‘원팀’ 전략

지난 9일부터 12일(현지 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2024 행사장 내 ‘SK그룹 통합전시관’ 모습. 전시 주제 영상을 상영하는 구형 LED ‘Wonder Globe’이 설치돼 있다. 통합전시관은 기후위기가 사라진 ‘넷제로’ 세상 속에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관람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테마파크 콘셉트로 기획됐다. SK그룹 제공

최 회장은 AI 반도체를 주축으로 한 공을 들이면서 그룹 내 협력 시너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SK그룹은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 등 반도체 인프라와 IT테크 분야뿐만 아니라 그룹 내 배터리와 에너지, 바이오 부문에서 미래성장 동력 확충에 공을 들이고 있다.

SK이노베이션과 SK머티리얼즈, SKC 등 계열사들은 이차전지 소재, 그린에너지 사업 등 전기차 배터리와 신재생에너지, 친환경 소재 등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SK바이오텍과 S바이오팜 등 차세대 성장 동력인 바이오 부문뿐만 아니라 SK이엔에스(E&S) 등을 중심으로 수소 및 신재생에너지 부문에서 시장 확장을 노리고 있다.

최 회장은 계열사들이 각 분야별로 벽을 허물고 시장공략에 공동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올해 초 CES 2024는 최 회장의 계열사간 협력 시너지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최 회장의 미래 전략은 신년 벽두에 열린 CES 2024에서 구체화됐다. 세계 최대 IT·전자 박람회인 CES에 올해 ‘행복’을 주제로 기획한 ‘SK 전시관’은 미래SK 전략을 가늠하는 압축 버전이었다.

SK㈜와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SK텔레콤, SKE&S, SK에코플랜트, SKC 등 그룹내 주요 7개 계열사가 공동 운영한 전시관에서 그룹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는 신기술이 융복합 형태로 구현돼 글로벌 마켓에 선보였다. 특히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이 공동 운영하는 데모룸에서는 AI를 위한 양사 협업 기술을 공개하면서 SK만의 토털 솔루션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 회장은 “SK그룹은 그린에너지와 AI·디지털, 바이오 등 인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들을 영위하고 있다”며 “우리의 장점과 역량을 결집하고 외부와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간다면 이해관계자들이 필요로 하는 토털 솔루션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원팀’을 강조했다.

올해 최 회장의 미래전략은 2024년 신년사에서 꺼낸 ‘해현경장’(解弦更張)이라는 4자 성어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녹록지 않은 경영 환경에서 변화와 개혁을 강조한 중국 한나라 사상가 동중서의 건의문 속 문구를 빗대 그룹 구성원에게 딥 체인지의 절박함을 표현한 것이다.

“느슨해진 거문고는 줄을 풀어내 다시 팽팽하게 고쳐 매야 ‘바른 음’(正音)을 낼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해현경장의 자세로 우리의 경영시스템을 점검하고 다듬어 나갑시다.”

이승욱 기자 gun2023@hanyang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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