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을 켜는 순간 동화가 펼쳐진다, 100세 ‘그림자 회화’ 거장의 마법
난쟁이가 첼로를 연주하자 달빛이 나무 사이로 쏟아진다. 고양이를 껴안은 소녀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나부끼고, 물가에 피어오른 무지개 주위에선 돌고래가 솟아오른다. 동화책이 아니라 전시장에 가득 찬 몽환적 풍경이다.
‘동양의 디즈니’라 불리는 일본 그림자 회화(影絵·가게에) 거장 후지시로 세이지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 ‘오사카 파노라마’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26일 개막했다. 휠체어를 타고 한국을 찾은 100세 거장은 “이번 한국 전시가 제 인생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전시”라며 열의를 보였다.
가게에는 후지시로가 창안한 회화 기법이다. 밑그림을 그리고 면도날로 자른 뒤 색색의 얇은 셀로판지를 붙이고 마지막으로 뒤에서 조명을 비추면 빛과 그림자가 황홀하게 펼쳐지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장르다. 작가는 “작업에 몰입하다 보면 면도날이 손끝과 일체가 돼 (면도날이 아니라) 내 손이 오려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신기하고 즐겁다”고 했다.
시작은 전쟁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초토화된 도쿄에서 물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골판지와 전구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영화 배급사에 들어간 그는 여성지에 가게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는 “흰색과 검은색만을 이용한 초기 작업은 기술적으로는 미숙하지만 내 작품 세계의 원점”이라고 했다.
이번 전시에선 한 세기에 걸친 빛과 그림자의 파노라마를 선보인다. 초기에 연재했던 모노크롬(단색) 작품부터 환상적 동화 세계를 구현한 듯한 색감의 6m 넘는 대작까지 200여 점이 펼쳐졌다. 일본의 국민 작가 미야자와 겐지(1896~1933)의 동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한 축을 이뤘다. ‘은하철도 999′의 모티브가 된 ‘은하철도의 밤’ ‘첼로 켜는 고수’ 등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는 “겐지 동화를 만나 처음으로 가게에 작가로서 눈을 뗐다고 해도 좋다”면서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기도(祈禱)의 동화라고 할까. 그 바탕에 깊은 기원과 기도가 담겨 있다”고 했다.
후지시로가 추구하는 사랑과 평화, 공생의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다. 20만명 이상이 숨진 히로시마 원폭 피해 현장 위로 알록달록한 종이학이 날아가는 작품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2015년 전후 70년을 맞이한 원폭 돔을 찾아가 스케치한 그는 “당시 전쟁을 경험한 몇 남지 않은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비참한 전쟁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후세에 남기고자 작업했다”고 했다. 고령에도 쓰나미 현장과 지진의 폐허, 원전 사고 현장을 누비며 스케치에 담는다. “재앙의 현실을 기록하는 작업으로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미래의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작가로서 사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가는 “한국의 전래동화를 읽고 제작한 ‘선녀와 나무꾼’ 시리즈 14점은 한국 관람객들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58년 여성지에 연재한 시리즈로, 당시 만든 작품은 분실했지만 이번 전시를 앞두고 다시 제작했다. 그는 “빛과 그림자는 인생 그 자체이자 인간과 통하는 커다란 힘을 갖고 있다”며 “이번 전시가 한국 관람객의 마음에 닿아서 한일 관계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고 했다. 전시는 4월 7일까지.
☞가게에(影絵)
일본 작가 후지시로 세이지(100)가 1948년부터 시작한 회화 장르. 밑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면도날로 자른 뒤 셀로판지를 붙이고, 조명을 투사해 빛과 그림자의 조화를 표현한다. 고도성장기 일본 대중문화예술 발전의 중심에 있었다. 일본의 성인 대부분이 어린 시절 동화집에 실린 그의 가게에 삽화를 보며 꿈을 키웠다.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가 가게에 거장 후지시로 세이지를 “동양의 디즈니”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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