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세계화시대와 메가시티리전(MCR)
1989년 12월 2일. 지중해의 작은 섬 몰타에 정박해 있던 구 소련 유람선 ‘막심 고리키’호에서 세계사를 뒤흔든 역사적인 회담이 열렸다.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구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이날 회담에서 냉전 종식에 합의했다. 이보다 한 달 전인 11월 9일 동서를 가르는 상징이었던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경계가 무너지고 냉전 체제가 허물어지면서 세계사는 커다란 변곡점을 맞았다. 영토와 경계, 그리고 국가가 중시되던 국민(혹은 영토) 국가는 힘을 잃었다. 다국적기업 초국가기구 해외시장 등이 더 중요한 시대가 시작됐다. 경계와 장벽의 상징이던 영토보다 네트워크가 중시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퇴행은 없다. 90년대 이후 이른바 ‘창세기의 플랫폼’이라 불리는 인터넷이 불쑥 등장했다. 91년 영국 컴퓨터 과학자 팀 버너스 리가 최초로 웹을 개발했다. 95년 첫 상업적 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가 출시됐다. 세상 사람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광활한 정보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른바 디지털혁명이 인류를 덮친 것이다.
네트워크 세상을 맞아 선진국은 지역 육성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수직적 상하관계를 내포하는 ‘로컬(local)’ 대신 ‘지역(region)’이 부상했다. 지역은 위계가 없다. 수도권도 하나의 지역일 뿐. 이들 국가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초광역권, 즉 ‘메가시티 리전(MCR)’ 구축에 본격 나섰다. 국가보다 대도시가 직접 해외와 경제활동에 나서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중앙집권국인 잉글랜드는 90년대 이후 정부가 발 벗고 나섰다. 1994년 9개 광역권에 정부지역사무소(GOR)를 개설한데 이어 99년 같은 권역에 광역개발청(RDA)을 설치해 예산을 쏟아 부었다. 2012년 자치단체연합기구(CA)를 만들어 광역 지자체의 자발적 협력을 유도했다. 현재 10개의 CA가 구축됐다.
프랑스는 인구 500만 명 규모의 레지옹(전국 13개)을 일반 지방자치단체로 구축해 광역화를 일상화했다. 하나하나가 부산 울산 경남을 합친 규모다. 이웃인 일본은 지난 2010년 간사이광역연합을 발족했다. 이 나라는 인구 1000만 명 규모의 초광역연합 구축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연방국인 독일과 미국도 광역자치단체의 연대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5+2 광역권 정책’을 내놨으나 실패했다. 그나마 정부는 자치단체들이 연대해 ‘특별지방자치단체’를 구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 법이 2022년 1월 발효됐다. 같은 해 부산 울산 경남 3개 지자체는 이 법을 근거로 ‘부울경 특별연합’을 추진, 각 의회가 규약까지 통과시켰으나 결국 무산됐다. 대신 3개 시·도는 ‘부울경 경제동맹’이란 협의회를 구성했다. 특별지자체 문턱까지 갔다가 협의회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뼈아프다.
선진국의 초광역권 정책이 국가발전을 위한 전략적 접근이었다면 우리는 다분히 기획성이었다. 선진국을 흉내 낸 정도였다는 지적도 있다. 더구나 정치적 수사로 촉발되는 일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부울경 특별연합은 지방선거 후 규약안이 폐기돼 ‘정치적 무산’이란 지적을 받았다.
안타까운 것은 ‘김포시의 서울 편입’ 논란이다. 표밭으로 인식한 여당이 먼저 불을 지폈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11월 특위까지 만들어 부산 광주 등 권역별 광역화 추진 전략도 내놨다. 총선을 앞둔 야당은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김포시는 급기야 주민투표를 위한 특별법까지 추진했으나 현재 폐기 일보 직전이다. 김포 시민만 우습게 됐다. ‘메가시티’란 거대 담론을 정치권이 선거용 일과성 정책으로 추진했다는 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계 각국은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국경 없는 경제전쟁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시대 ‘평평한 지구’를 뒤덮고 있는 네트워크에 올라타려면 초광역권 육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우리는 언제까지 서울공화국과 지방의 식민지화라는 도식에 발목 잡혀있어야 하나. ‘김포 메가시티’건을 계기로 정치권의 각성을 기대한다. 아울러 부울경을 포함한 지자체들이여 명심하라. 지금은 진정으로 몸집을 불려 세계와의 경제전쟁에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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