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담] 문학의 본령을 지키자

경기일보 2024. 1. 3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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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소설가(잔아박물관장)

옛날 부산 역전에 이상한 지게꾼이 있었다. 지게에 짐을 지면 꼭 뒷걸음질로 다녔는데 발걸음이 여느 지게꾼보다 더 빨랐다는 것이다. 만약 요즘 그런 지게꾼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누구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그 기절초풍할 모습을 바라볼 테고, 누구는 정신병자의 소행이라며 혀를 찰 테고, 누구는 종말론적 징후라며 타락한 세상을 걱정할 것이다. 어쨌든 상식을 벗어난 파격임에는 틀림없다.

파격성은 한마디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 에너지다. 요컨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그것들의 중심가치를 꽃피우는 데 작용한다는 말인데 그 파격성을 반역성(反逆性) 또는 반역의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얀 예복에 까만 나비넥타이를 맨 신랑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미적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까만색 나비넥타이가 하얀색 예복에 반역했기 때문이다. 예복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작은 나비넥타이가 온몸을 감싼 예복에 반역해 조화를 이뤄낸 그 에너지야말로 거대한 화산 폭발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서 그 반역성을 문단의 타락상을 정화시키는 도구로 삼으면 어떨지 싶다. 아무리 기회주의와 배금주의가 쓰나미처럼 밀려와도 결코 오염되지 않을 빛살, 생기(生起)의 시원인 그 미미한 빛살을 이제 거대한 햇뭉어리로 분화(噴火)시켜야 한다. 문학의 순결한 본령을 지키려는 일종의 함성이랄까.

그렇다. 문단은 순결한 영혼들의 세계다. 창조적인 바보들, 문제적인 바보들이 어울리는 장이다. 솔직한 곳이다. 정직한 곳이다. 모함하지 않는 곳이다. 외로운 곳이다. 고통을 즐기는 곳이다. 슬픔을 즐기는 곳이다. 간교하고, 눈치 빠르고, 빈틈없는 자들의 활동무대가 아니다. 정치판도 아니고 경제판도 아니다. 이권을 노리는 장사판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은 문명이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점점 더 배우가 돼가지만 아무도 그런 가면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위선의 가면을 경계한 칸트의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200년 전 칸트의 시대가 아니다.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가 아니라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현실이기에 소름 끼치는 것이다. 위선이 진실이 되는 문단을 상상해보라. 문학을 배금주의의 도구로 이용하는 그 참상을 상상해 보라. 하지만 좌절할 수는 없다. 오염되지 말고 의연한 단독자(單獨者)로 우뚝 서자.

문학의 위대성은 진실을 캐는 작업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캐는 그 고뇌스러운 반역의지가 지성이다. 위선에 농락당하는 지성은 또 다른 가면일 뿐이다. 눈치 보는 지성도 가면일 뿐이다. 가면은 야비다. 죄는 법으로 옭아맬 수 있지만 야비는 법망이란 그물로도 씌울 수 없어 더더욱 해롭다. 공자도 “그럴듯하면서 그렇지 않은 것을 싫어한다(惡似而非)”고 했지만 거짓이면서도 참인 척인 것, 범죄이면서도 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야비다. 오염됐으면서도 순수한 척인 것,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척인 것이 야비다. 죄를 지으면 형벌이란 매를 맞지만 야비한테 걸리면 사람이 미치고 만다.

이처럼 야비는 인간의 판단 능력을 무차별적으로 마비시킨다. 우리 속담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리게 한다지만 인터넷 시대인 지금은 웅덩이의 수억 배인 저수지를 휘젓는다. 그러니 무관심이나 이해심 따위의 안일한 가치로는 문학판의 정화는 어림없다. 카프카는 문학을 “주먹으로 뒤통수를 쳐서 각성시키는 것이며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라고 역설했다. 여기에서 문단의 부패 구조를 깨는 도끼에 외로움을 대입시키면 더 효율적인 정화 대책이 될 것이다.

감상 차원의 멜랑콜리한 외로움이야말로 진실을 캐는 가장 적절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로움의 선적(善的) 가치인 순결, 고뇌, 연민, 눈물, 이슬, 별빛 등의 원개념이 전투적인 반역성이란 사실을 간과해 왔다. 순결과 고뇌보다 더 치열한 전의(戰意)가 어디에 있으며, 연민과 눈물보다 더 강력한 파괴력이 어디에 있으며, 이슬과 별빛보다 더 섬뜩한 살상무기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처럼 외로움의 반역성은 진실을 캘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도구인데 그 반역성은 허구적(편의주의적)인 행복을 부정하는 가치전복(價値顚覆)에서 생성된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느끼고 인식한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그런 허구적인 행복은 자칫 야비에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다. 따라서 허구적인 행복을 부정하는 외로움의 반역성은 오염된 문단을 정화시키는 가장 적절한 도구가 된다. 그 반역성이야말로 순결을 엄호하고, 위선을 타매하고, 미적 감각을 살리고, 창조의식을 고취시키고, 기회주의자를 혐오하고, 허무를 인정함으로써 무엇이 본질이고 진리인지를 항상 캐묻게 한다. 요컨대 외로움의 반역성만이 허구적인 행복을 부정하는 진정한 행복조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 문단의 타락은 이제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고 있다.

타락의 일상화현상(日常化現象)이랄까. 타락이 뭔지도 모르거니와 오히려 타락에서 친근감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상금을 타게 해서 나눠 먹는 것 정도야 눈감아 줘야죠.” 어느 문인의 말이다. 이태 전만 해도 “침 뱉고 싶은 놈들”이라며 분개했던 문인이다. 타락의 일상화현상이 얼마나 팽배한지를 일깨워주는 그 사례를 보며 이제야말로 거꾸로 걸어다니는 모험의 필연성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 지금은 디오게네스 같은 철인이나 돈키호테 같은 저돌적인 구원자가 절실한 시대다.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다니는 반역보다 더 지혜로운 대책이 어디에 있으며, 창을 들고 풍차에 돌진하는 반역보다 더 치열한 전투 의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기회주의와 배금주의가 판치는 우리 문단에 가차 없이 칼을 들이댈 그들이야말로 오늘날 꼭 필요한 개혁형 인물이다. 요컨대 문학의 본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 같은 문인들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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