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이중과세를 즐기자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2024. 1. 31.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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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이제 곧 설이다. 요즘은 누구나 '설날' 하면 음력 정월 초하루를 생각하지만 이날이 '설날'이란 이름을 독차지하기까지는 100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양력, 즉 그레고리우스력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96년 1월1일부터다. 고종은 개국 504년 11월17일을 505년 1월1일로 삼는다는 조령을 내렸다. 그러나 수백 년간 사용한 역법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었다. 민간은 물론 정부조차 '음력'(陰曆) 또는 '구력'(舊曆)이라 부르며 옛 달력을 함께 사용했다. 혼란의 시작이었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당시까지 음력날짜로 실시한 국가예식은 모두 중지되고 조선총독부는 양력만 사용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대부분 조상의 제사와 가족의 생일을 음력으로 헤아렸으나 이는 가가호호(家家戶戶)의 일이었기에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해의 시작인 설은 달랐다. 농어촌이야 평일이나 휴일의 구분이 무의미했기에 문제는 도시였다. 평일이었음에도 다들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관공서나 회사는 텅 비고 상가는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그러다 보니 불편한 사람들이 생기고 이 첫날 아닌 첫날, 휴일 아닌 휴일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바로 '이중과세'(二重過歲) 논쟁이다. 이중과세라 하면 보통은 같은 대상에 세금을 두 번 매기는 것처럼 들리지만 여기서는 설을 두 번 쇤다는 뜻이다.

설은 양력의 신정(新正)과 음력의 구정(舊正)으로 나뉘어 주도권을 다투기 시작했다. "양력설로 한 번만 쇠자"는 주장은 일제강점기 생활개선 운동의 주요 슬로건 가운데 하나였다. 음력설은 시대착오적이나 비과학적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괴이한 풍속이라며 비판받았다. 특히 낭비는 이중과세의 대표적 폐해로 꼽혔다. 명절을 두 번이나 지내다 보니 이래저래 가계의 지출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실제 설을 연거푸 쇠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저 신정을 쇠는 사람과 구정을 쇠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양력설은 진고개의 설이오, 음력설은 종로의 설'이란 말이 있다. 진고개는 오늘날 서울 충무로 일대로 일제강점기에는 '혼마치'(本町)로 불렸다. 일본인 상점이 밀집한 까닭에 일찌감치 양력으로 일상을 바꾼 일본인들은 1월1일이면 모두 가게 문을 닫았다. 반면 전통적으로 조선인이 상권을 장악한 종로는 음력설에 철시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맞았건만 이중과세 논란은 계속됐다. 정부는 양력과세를 권장했으나 음력설에 맞춰 돈을 새로 찍고 열차도 증편했다. '구정(舊情·옛정) 못 잊는 구정(舊正)' 탓에 공휴일이 아닌데도 시내는 한산하고 터미널은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노동자들은 출근해도 할 일이 없거나 설령 있더라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1960년대 말부터 구정을 공휴일로 하자는 주장이 조심스레 나왔고 1970년대 말부터는 해마다 국무회의의 주요 안건이 됐다. 찬반논란 끝에 1985년에야 공휴일로 지정됐으나 '민속의 날'이라는 애매한 이름에다 단 하루뿐인 휴일이었다. 구정이 '설날'이란 이름을 되찾은 것은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3일 연휴가 된 것은 1989년부터다. 늘어난 공휴일에 "놀아도 너무 논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당시까지 구정을 쇠는 가정이 80% 넘었기에 대부분 환호했다. 이렇게 음력설은 '설날'이란 이름을 되찾았지만 이중과세 문제는 그대로 남았다. 우리는 여전히 한 해를 두 번 맞이한다. 하지만 그게 문제일까.

매년 1월이면 각종 어학 학습지 판매량, 피트니스센터 회원은 늘고 담배 소비량은 준다고 한다. 지난 1월1일에도 많은 분이 각자 결심을 했을 터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실천을 이어가는 분도 있겠으나 또 작심삼일로 끝낸 분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우리에게는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 아주 오래전 독립신문 사설에도 이런 글이 있다. '기왕 양력과 음력으로 설을 두 번이나 쇠었으니 옛 마음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하는 것은 대한(大韓) 사람이 과세 한 번 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배나 나을지니.' 즐기자! 이중과세를.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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