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 우리들의 ‘올드 오크’[동아광장/김금희]
시리아 난민 외 英 주민들도 와서 함께 먹어
거장, 마지막 영화까지 연대 희망 놓지 않아
물론 난민들을 돕는 사람들도 있다. 오래된 동네 술집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는 손님이 끊길까 봐 갈등하면서도 내전으로 모든 것을 잃고 이국으로 온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영화는 어느 동네에나 존재할 가장 평범한 얼굴의 혐오를 보여주며 적대를 양산하는 세계를 세공한다. 그렇게 해서 이것이 정말 당신이 원한 삶인가를 묻는 로치의 영화적 역량은 여전하고 절망과 슬픔을 밀고 올라오는 먹먹한 감동 또한 짙다.
평행선을 달리는 거주민과 난민들의 갈등 속에서 마침내 난민 소녀 ‘야라’를 비롯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창고로 사용했던 올드 오크의 또 다른 홀을 수리해 급식소를 열기로 한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공간이 생기자 시리아 사람들뿐 아니라 거주민들도 급식소를 찾았고, 그들은 조국을 잃은 난민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가난과 고립 속에 살아가고 있던 영국인들이었다.
광산 노동자 부모 밑에서 자란 TJ는 “굶주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라는 표어 아래 파업을 함께했던 동네 어른들을 떠올리고 현재 삶을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희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용기, 저항, 연대’라는 그 시절 슬로건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건 현실에서의 효용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버려버린 것이라는 자각이다. 힘써서 이뤄야 하는 그런 가치들보다 희생양을 만들어 폭력적으로 소모하는 것이 더 쉬워진 세상이니까. 한국의 요즘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었다.
거장의 마지막 영화라서였을까, 이야기가 묵직한 감동을 주어서였을까. 관객들은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좌석에서 기다렸고 박수를 쳤다. 그 박수는 로치가 50년 동안 보여준 리얼리티에 대한 집요한 몰두를 기리는 것이었을 것이다. 노장은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자신의 어느 영화에서도 연대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년)에서는 모든 시스템이 전산화되면서 문맹에 가까운 신세가 된 노인과, 버스를 잘못 타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보육수당을 빼앗긴 싱글맘이 서로를 도왔다. ‘미안해요, 리키’(2019년)에서는 자기희생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택배 노동자 리키의 상처투성이 얼굴을 우리에게 인식시켰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 인간을 다뤘고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허용된 절대적인 힘인 희망을 영화에 담았다. 그러니 영화관에 모인 우리에게 로치의 영화는 더 이상 무력해지고 싶지 않은 이들이 모여드는 또 하나의 ‘올드 오크’였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우산이 없어서 눈에 보이는 식당으로 얼른 들어갔는데 마침 사회적 협동조합에서 만든 곳이었다. 1980년대 분위기로 꾸며놓은 그곳에는 65세 이상의 직원들로 운영되고 있었고 식탁 위의 안내를 읽으니 수익금도 노인들을 위한 복지에 사용된다고 했다. 떡볶이와 김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뒷자리에서 어묵 꼬치를 끼우고 있던 어르신이 허리를 펴며 “하루 종일 했더니 이제는 지겨워” 하고 약간의 투정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다른 동료가 웃으며 다가왔고 음식이 나왔을 때쯤 둘의 대화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대한(大寒)의 날씨 이야기로 넘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은 대한이었다.
“대한 지나면 겨울도 끝이야.” “그렇지, 이제 겨울도 다 간 거야.” “맞아, 좀 있으면 꽃 핀다.”
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패딩을 입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관광버스에서 내린 외국인 관광객들은 모두 추워 종종걸음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르신들은 봄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분들에게 대한은 추위의 절정이 아니라 봄기운의 시작이었다. 이제 로치의 새로운 영화를 보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지금 이 식탁에서 들은 대화가 앞으로도 안온한 위로 속에 재생되리라 예감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올드 오크’도 매번 새롭게 정의되리라고.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것은 봄이 확실할 때가 아니라 아직 겨울 속에 머무를 때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 어묵 국물을 들이켜고 있는 식탁은 손에 꼽을 만큼 특별했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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