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1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올해로 55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월례 독회를 열고 작년 8~9월에 출간된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1월 독회의 추천작은 2권. 박지영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와 서이제 소설집 ‘낮은 해상도로부터’입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이달의 이웃비
프랑스의 정신의학자이자 작가인 프랑수아 를로르François Lelord는 ‘엑토르는 새 인생을 살려고 한다’(Odile Jacob, 2014)라는 소설에서 정신과 의사인 주인공의 입을 빌려, 세상 사람들을 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는데, ‘감염병’으로 존재하는 자와 ‘감염되는 자’가 그 둘이다. ‘감염병’은 부호, 정치가 등 사회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있는 사람들이고, 감염당하는 자들은 ‘감염병’에게 장악당한 보통 서민들을 가리킨다.
이런 분류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없지만, 지도자급 인사들이 보통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를 새삼 떠올리게 하는 한편, 그 영향가들을 ‘감염병’ 그 자체로 지시함으로써 상위 계급의 무분별함과 해악성을 노골적으로 풍자한다는 점이 눈에 띤다고 할 수 있다.
뜬금없이 낯선 외국 소설을 들먹인 것은 박지영의 ‘이달의 이웃비’(민음사, 2023.09)가 바로 이 소설의 반사광에 해당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박지영 소설집의 거의 모든 인물들은 영향력이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를 바가 없는 자들’(수년전에 ‘비체[非體; l’abject]’라고 종종 지칭된)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들의 생물적 존재성은 너무나 뚜렷해서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증명하려는 활동이 왕성히 분출하는데, 그 양상은 놀랍게도 프랑스 작가가 ‘감염병’이라고 지칭한 존재들의 활동을 고스란히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감염되는 자의 존재상을 가지고 ‘감염병’이 되기 위해서 아득바득 용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양상이 도출되기 전의 사전적 상황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즉 박지영의 소설 사건들은 기본적으로 ‘바탕 이야기’와 ‘표면 이야기’라는 두 겹의 이야기 더미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탕 이야기’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만, ‘표면 이야기’의 의미가 온전히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탕 이야기’에는 앞에서 ‘비체’로 지칭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순수한 ‘비체’이다. 문헌을 뒤져보면, 이런 ‘비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micropsuchia 혹은 스피노자의 l’abjectio의 상황에 빠진 존재들, 즉 “부당하게 형편없는 삶 속에 빠진 존재들”로서 인간으로서의 긍지와 존엄을 박탈당한 존재들이다. 실례로 들자면, 정신박약아나 정신질환자, 무위도식자, 치매 노인 등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도스토옙스키적인 ‘비참한 사람들’과 다른데, 그것은 후자가 인간 이하로 추락해 있다는 자신의 존재 상태를 깨닫고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데 비해, 비체들은 그 상황 속에 침닉해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이상, 앙드레 꽁트-스퐁빌 André Comte-Sponville,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13, p.118, ‘bassesse’ 항목 참조)
또 하나의 부류가 있다. 그들은 이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이다. 간병인, 직장을 그만 둔 가족 등이다. 주로 주인공 혹은 화자 역할에 배당된 인물들로서, 그들은 상태적으로 비체들에 비해서 상위에 있다. 그 점에서 그들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일 것 같지만 그러나 아니다. 사회의 이상적 교범에 의하면, 그들은 영향력 있는 사회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낮은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돌봄은 생산적인 돌봄이 아니라 소모적인 돌봄이며, 따라서 그들의 돌봄은 ‘비체들’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데에 기능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삶 역시 무의미하긴 마찬가지다.
이 두 부류는 돌봄/의존과 인내/반발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관계의 양상을 끊임없이 변이시키면서도 그 형식은 되풀이하는 데서 겨우 생의 박동을 느끼니, 그 박동 자체가 한없는 지루함의 터널을 판다.
이상이 ‘바탕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제들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작성한 소설들은 예전에도 빈번히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박지영의 독자성은 이 바탕 이야기 위에 새로운 ‘표면 이야기’를 구축함으로써, 바탕의 상황을 넘어서려는 지평을 열어보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 그 노력은 바로 화자 혹은 주인공을 구성하는 ‘무의미한 돌봄’의 상황에 놓인 존재들이다. 이들이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는 건, 도스토옙스키적 ‘비참한 사람들’처럼 이 상황에 대한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표면 이야기는 하나의 목표 하에 두 방향의 계획을 꾸민다. 목표는 모든 인물들을 ‘인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 첫 번째 계획은 인물들 사이에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민 사회의 제 1원리는 ‘천부인권’을 ‘사회계약’으로 지탱하는 것. 즉 인물들 사이에 계약관계를 수립하는 게 인간의 지위를 회복하는 첩경이 된다. 그래서 화자 혹은 주인공은 현재의 ‘돌봄/의존’ 관계를 ‘거래’ 관계로 변환하고자 하는 계획이 수립된다. 그러나 돌봄을 받는 자는 거래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 그 대신 돌봄을 받는 자 역시 법적으로는 일반 시민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장해 줄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직계 가족이거나 아니면 시청이나 정부 등 공공기구거나. 그들과 거래 관계를 맺으면 관념적 차원에서 두 비체적 존재들이 두루 지위를 회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한가? 누구나 잘 알다시피 영향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스스로의 이득을 극대화하는데 써먹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문학에서도 이미 김유정의 ‘봄봄’에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듯, “애최 계약이 잘못된” 사정을 빈번히 표출해 왔던 것이다.
이로부터 두 번째 계획이 발생한다. 돌봄을 받는 자의 가정된 지위와 실질적 지위의 차이를 이용하여 이들의 실종이 오히려 존재를 인정받게 되는 상황 속에 돌봄을 받는 자 스스로를 해결사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종종 모바일에서 문자로 받는 공공기관의 메시지, “A시에서 실종된 xx세의 아무개를 찾습니다”에 무위도식하는 누군가와 계약을 맺어, 실종된 사람을 찾는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때 계약은 인터넷에 올린 일종의 쓸모없는 내용을 담은 거래이고, 그런 터무니 없는 거래에 문제를 앓는 ‘비체’들이 응답할 것이라고 가정된다.
두 번째 계획을 풀 버전으로 풀어내고 있는 게 표제작인 ‘이달의 이웃비’이다. 지적 장애인으로 태어나 죽은 형과 그를 돌본 ‘동석’의 사연이 ‘바탕 이야기’를 이루고, 인터넷을 통해 만난 ‘병식’과의 사건이 ‘표면 이야기’를 이룬다. ‘동석’은 형을 돌보는 일에서의 실패를 딛고 병식과의 일을 통해 이들을 당당한 사회 시민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것에 대한 각성을 주는 문화적 아이콘은 ‘무한도전’이다.
그렇다면 병식은 실종 치매 노인을 찾아주는 일을 통해 시민으로서 발돋움했던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런 시도가 처참한 실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폭로한다.
작품 안에서 그 실패는 논리적으로 구축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시도는 영향을 주는 계급의 행태를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것, 즉 감염병에 그냥 발병으로서 감염된 게 아니라, 감염병의 방식 자체가 감염되어 발작을 일으키고야 마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노인에게 성폭행을 가하는 행동은 기계적 감염의 감염도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형상적으로 보여준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 소설(들)은 인간의 지위에서 밀려난 존재들이 인간의 울타리 안으로 진입하려는 노력의 운명적인 실패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인간(주의) 사회에 도사린 무서운 악마성을 폭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 인간들은 자신에게 내장된 그 악마성과 그것의 감염 효과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집은 생생한 드라마를 통해 절감케 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의 또 하나의 원인이 있으며, 그것은 작품의 논리가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내적 규열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병식’과의 거래를 통해 병식을 북돋고자 하는 ‘동석’의 행동이 그 스스로의 계획에 의해 바깥의 조정자로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즉 동석은 자신의 계획을 통해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감염병’이 되고 만 것이다.
작가가 이 문제를 모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문학적 투신이 얼마나 성심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성은 작품 속에서 오로지 ‘사변’을 통해서만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그런 반성이 사건으로 현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소설(들)은 아직 미완 상태이다. ‘동석’ 자신이 그 말을 하고 있듯이 이 소설(들)은 더 쓰여져야 한다.
◊낮은 해상도로부터
아주 오래전 청소년을 위한 철학동화로 베스트셀러가 된 ‘소피의 세계’에서 저자 요슈타인 가아더는 ‘대위법’이라는 장에 “두 가지 이상의 멜로디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라고 쓴 적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대위법의 핵심을 짚었다는 점에서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점은 대위법에서는 둘 이상 세계의 길항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연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대위법은 음악의 근본적인 수직성(화성법)을 수평성으로 변환한다. 이 변환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오늘의 문학작품에 관해서는 이 수평성이 대위하는 세계들 각각에게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위계관계를 거부한다는 것이리라.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서이제의 소설집, ‘낮은 해상도로부터’(문학동네, 2023.08)는 ‘대위법’적 세계의 선명한 풍경을 제공한다. 모든 문학은 잠재적으로 현실과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 대위법적이지 않은 게 없을 터이지만 거기에는 대체로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 배경이 깔려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반면 서이제의 소설들은 허구와 실제를 한꺼번에 허구의 장(場) 안으로 끌어들여 두 개의 상상세계로 만들고 드잡이질을 시킨다. 바로 거기에 서이제 소설의 일차적 특징이 있다.
이에 더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 대위법이 세 개의 세계 사이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소설을 ‘자아의 세계의 대결’로 보았던 고전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소설에서 길항하는 세계는 ‘일반 세계’와 ‘개인 세계’ 둘을 가리켜왔다. 서이제 소설은 구분이 다르다. 여기에 개인/집단의 구분은 없다. 대신 ‘즉물적 현실’ / ‘상징세계’ / ‘가상세계’가 서로 길항하며, 이는 이 소설집 전 작품들에 한결같은 바탕 구조로 놓여 있다.
‘즉물적 현실’은 생존을 향해 꼬무락거리는 보통 생명들의 현실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통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보통 생명들’이라고 한 것은, 세계 관계가 특정 실체들에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호참조적인 데서 기인한다. 즉 우리가 흔히 겪는 일반 세계가 서민 세상과 지배적 위치에 놓인 경영자들의 세상 사이의 대립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할 때 ‘즉물적 현실’은 서민 세상을 가리키지만, 구제역으로 돼지가 살처분되는 상황에서 즉물적 현실은 날벼락 맞은 돼지들의 그것을 가리킨다.
다음 ‘상징 세계’(부르디외적 의미로 명명된)는 즉물적 현실을 관할하는 규정적 현실이다. 이 현실을 구성하는 기본 성분은 법(그리고 그것의 집행)과 이데올로기(그리고 그것의 드리움)이다. 상징 세계는 즉물적 현실을 지배하고 관할하며, 나누고 견인한다. 이의 관리체계에서 탈락하는 즉물적 현실은 소거의 운명을 맞는다.
서이제 소설의 대위법적 특성은 이 두 세계 사이의 지배/피지배적 성질을 일차적으로 차단하고 각각의 세계를 자율성의 울타리로 보호하여, 그 각각에서 일어나는 생생한 실존 양상들을 표출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즉물적 현실은 상징세계에 의해 견인되거나 박탈되는 경향이 지연되는 시간을 얻어, 두 세계 사이의 관계의 부당성이나 상징세계의 억압성을 깨닫고 분석하는 작업을 할 수 있게 되며, 다른 한편 즉물적 현실 자체의 생존력 혹은 역동성을 찾거나 쌓는 일을 하게 된다.
문제는 이 지연된 시간은 임의적이고 잠정적이라는 것, 실제로 두 세계 사이의 상호 침투는 추호의 여지도 없이 긴박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전선에 날아든 까치떼를 보고서 멍때리고 있을 때, 까치는 이미 정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각 세계의 자율적 작동과 상호간 길항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이 두 작동이 한꺼번에 긴밀하게 포착되고 표현되지 못하면, 독서를 지루하게 만드는 자질구레한 세목들의 나열이 되거나 아니면 지적 사변(思辨)으로 흘러감으로서 이 역시 체감의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세 번째 ‘가상세계’는 이런 궁지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가상 세계는 현재의 두 세계의 대립의 후속으로서의 미래 세계가 감당한다. 가정적으로 미래 세계는 앞 두 세계의 길항의 결과를 측량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고립된 자율성이 작동하고 있다. 실제로 가상 세계는 저의 존재 양상을 보여줄 뿐, 자신의 예정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상세계는 두 세계의 얽힘 관계를 환상적으로 뒤집는 현상을 연출한다. 그럼으로써 앞 두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 세계’(혹은 인류세)의 악마성을 폭로하는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다. 그 스스로의 구조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채로.
이런 경과를 통해 세 세계 사이에는 인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상호작용이 없는 세 수평적 세계들은 서로간의 결속력을 상실할 때 자유낙하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중력의 작용이고, 중력이 아무리 약한 힘이라도 그 결과는 파국이다. 서이제의 소설은 그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송신한다. 이건 정직성인가? 무기력인가?
그러나 중력의 원천은 어디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세 세계를 모두 굴리는 ‘부처님 손바닥’을 가정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면 세 세계 사이에는 가상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증강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광경이 표현되어야 한다. 이 역시 새로운 탐구의 영역이다.
이 탐구에 대한 해결법이 단박에 어느 하늘에서 떨어질 수는 없다. 세 세계의 관계가 형성하는 네트워크의 어느 균열지점으로부터 질문이 피어나고 이 질문 자체가 삶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그 점에서 본다면 마지막 작품 ‘두개골의 안과 밖’은 사변(思辨) 자체를 생체험으로 변환시키고 하는 뜨거운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구효서·소설가
◊이달의 이웃비
박지영 소설들은 장난스럽다. 재밌고 웃긴다. 표제작 제목부터가 그렇다. 이웃비란 이웃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란다.
얼마 전엔 김지연 작가가 자신의 단편소설에 ‘반려빚’이라는, 없는 말을 지어내 제목으로 삼은 적이 있었다. 이웃비도 사전에 없는 말이다. 작가는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다른 무엇도 아닌 말을 만드는 사람이다.
말을 만들면 그 순간부터 그 말에 해당하는 대상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 ‘이웃비’가 있는 세계는 이웃비가 없던 세상과 다른 세상일 테다.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작가라고 할 만한 이유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대가로 형제들에게 비용을 청구하는데, 청구 명목이 엉뚱한 것은 물론 이루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간교하고 다양하다. ‘기본적인 케어 외에 다정함과 상냥함을 가능케 하는 추가 복지비용.’ ‘다른 자녀들의 자식 된 도리를 대신하는 데 따른 대리 효도 비용’ 등등, 말이 비용이지 억지로 알겨내는 돈이다(‘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미연과 태연이 두 번째로 촬영하려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은 ‘씨, 발아.’고(‘경주는 왜냐하면’), 동석이 달랑 ‘마음이 쓰이다.’라는 문장을 당근마켓에 올리자 그걸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이달의 이웃비’). 화단 한구석의 메마른 흙을 손으로 파내고는 움푹해진 구멍에 머리를 묻는 민주(‘누군가는 춤을 추고 있다’)가 있는가 하면, 전쟁이 일어난 줄 알고 27년간 방공호에 산 남자(‘팀파니를 치세요’)가 등장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다 보면 박지영 소설에 꼼짝없이 발목이 잡혔음을 깨닫게 되고 빠져나오기엔 이미 늦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여전히 재미있기는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서술자가 ‘염병’ ‘상스럽다’ ‘쌍년’ ‘더럽게 엮이다’ 따위의 말들을 집요하게 혹은 화려하게 물고 늘어지며, 읽는 사람을 지구본 회전무대에 태워 돌린다. ‘경주는 왜냐하면’에서는 실제로 ‘별것’ ‘꼴랑’ ‘꼴에’ 같은 말들을 소제목으로 삼아 천착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작가란 없는 말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미 있는 흔한 말에 딴지를 걸거나 대척의 의미를 덧씌워 언어 파생품, 즉 새로운 동음다의어들을 만들어내는 짓궂은 직종일지도 모른다.
원고료 가성비만을 따진다면 결코 그처럼 심히 애쓸 수도 집요할 필요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굳이 그것을 감행하고야 마니, 그 까닭을 짓궂음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아니면 언어의 융합과 생산이 곧 새로운 세계의 발명이라는 긍지를 신념으로 삼는 것이든지.
‘이달의 이웃비’를 읽다 보면 반복해 떠올리게 되는 말이 있으니 ‘환대’와 ‘이웃’이 그것이다. ‘이웃’은 이미 표제작에도 언급돼 있거니와 ‘환대’ 또한 본문에 노출되어 있다. 환대라는 말은 때로 작품 속에서 ‘돌봄’ ‘배려’ ‘친절’이라는 말로도 확대 변용되는데 ‘이웃’과 ‘환대’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와는 달리 본문에서 자주 인용되는 ‘쓸모와 쓸모없음’, ‘별것과 별것 아님’의 구도는 상호 조건적 관계가 아닐뿐더러 음절의 부정적 구성만 보더라도 의미의 배치背馳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서도 쓸모없음이 쓸모가 되고 별것 아님이 별것이 되는 ‘역 또한 진’의 기묘한 이치를 박지영은 특유의 활달한 이야기를 통해 능청스레 풀어낸다.
이와 같은 유희를 ‘환대’와 ‘이웃’에 대해서도 항목별로 시도해 보자는 게 ‘이달의 이웃비’의 의도가 아닐까 싶은데, ‘환대’에 대해서라면 ‘조건적 혹은 무조건적 환대’에 대한 데리다의 담론으로도 얼마든지 ‘환대인 듯 환대 아닌 환대’를 해당 작품들의 내용을 들어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웃’ 또한 이웃을 neighbor가 아닌 other로 놓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분석한 ‘세미나7(라캉,1960)’을 참고하면 박지영이 호명하는 이웃과 박지영이 이웃을 호명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거니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작가나 작품의 의도를 짐작해 보는 게 소설 읽기의 전부일 수 없고 전부여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한 의도를 작가가 어떻게 ‘돌봄’ ‘배려’ ‘친절’ 등의 구체적인 이름들에 대입해 나아가면서 ‘상스러움(쌍년)’ ‘더러움(더럽게 엮임)’ ‘모욕’ ‘꼴랑’ ‘꼴에’ 등에 해당하는 낱낱의 인상적인 사례로 사건화 해 나아가는지, 그 요령을 살펴보는 재미를 놓치면 안 될 것이다. 뜻보다는 차라리 기분을 전달하는 게 소설의 소임이라면 그걸 잘, 신나게, 능청맞게 해치우는 게 박지영의 소설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호락호락하다는 말은 아니다. 쓸모없음을 쓸모로, 별것 아닌 것을 별것으로, 상(쌍)스러움을 상도常道로, 더러움을 순수로 마술처럼 뒤집어 버리는 일이 어찌 만만할 것인가. 환대와 이웃에 관한 천착 또한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완강하고 막막하게 나누어진 ‘경계’의 안과 밖에, 비겁하고 교활하게 양발을 걸치지 않고는, 그 사이(작품에서는 42라고 적는다. ‘이달의 이웃비’)에 장난스럽고 위태롭게 서서 분투하지 않고는 이루어 낼 수 없는 마술이다.
따라서 마술의 언어는 하염없이 분절되고 분절되어, 따라 읽는 이가 어지러워 참 어지간히 키질을 해대는구나 싶게 안팎의 영역을 종횡무진 누빈다. 키질하는 언어를 따라 한동안 롤러 코스터링을 당하고 나면, 늘 타던 코스를 탄 것 같은데도 독자는 영 다른 영역에 부려지는 유쾌 통쾌함을 맛본다. 박지영 소설이 재밌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승우·소설가
◊이달의 이웃비
박지영의 소설들은 인물에 대한 것이다. 하기야 인물에 대한 소설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인물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박지영의 문장이 인물의 겉과 속을, 마치 분할 화면 속 이미지처럼, 동시에, 속속들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의 이면에는 그 행동을 한 사람의 속셈이 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속셈이 밝혀졌을 때만 알 수 있다. 박지영의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한다. 사람은 한 겹이 아니라는 것, 쉽게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 드러난 것 말고 감춘 것, 감추려고 한 것을 밝히는 것이 인간 이해의 열쇠라는 것.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박지영의 인물들이 아니라 그 인물들에 대해 말하는 화자이다. 사실 박지영 소설의 매력은 이 화자의 캐릭터로부터 나온다. 이 화자는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일일이 주석을 다는데, 구사하는 말투가 냉소적이고 성찰적이다. 냉소적으로 성찰적이다. 어쩌면 거의 모든 소설들이 3인칭인 것과 이 화자의 캐릭터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꿰뚫어 본다. 대인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제하는 그 꿰뚫어 보는 시선에 의해 평범한 인물들의 평범하지 않은 면이 드러나고, 그래서 독서가 불편해진다. 그 불편함은 진실을 마주한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다. 역설과 반어적 표현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진실이 있다는 것을 ‘이달의 이웃비’의 소설들은 알려 준다.
예컨대, “강선동은 착한 아이였다.”라는 문장은, 그의 소설에서는, 착함의 역설을 시연하기 위한 반어법이다. ‘착하다’라는 단어에는 겹겹의 의미가 포개져 있으니 그 겹들을 일일이 들춰보아야 한다. 소설이 그 들춰보기의 과정을 따라 가는 걸 보면 작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역설이다. ‘소외된 사람을 찾아 약점을 드러내고 더욱 소외되게 만드는 일’이 어떤 착한 사람의 착함이다. 그러고 보면 착함은 일종의 처세술이고, 또 재능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것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비용(이웃비)이기도 하다.
돌봄의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는 소설들(이를테면 ‘쿠쿠, 나의 반려 밥솥에게’나 ‘이달의 이웃비’ 같은)에서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돌봄의 어려움이나 책임, 윤리 같은 것이 아니라 선행의 이면이다. 더 정확하게는 선행을 하는 사람의 속셈, 그런 행동을 하는 저간의 사정. 이 작가의 관심이 인간론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 문장 곳곳에 유머와 재치가 깃들어 있지만, 독자는 웃지 못한다. 웃기 힘든 유머고 재치다. 편하게 즐기려고 객석에 앉아 있다가 무대에 끌려 올라간 것 같은 느낌이 지배한다.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설득되고 나중에는 중독된다. 감상적이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 이 작가의 문장, 냉소적으로 성찰적인 독특한 말투로부터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아마, 박지영의 독자가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김인숙·소설가
◊낮은 해상도로부터
서이제의 소설은 즐겁다. 즐겁다는 표현이 가능한가, 자문하며 쓴다. 뭔가 더 정교한 표현이 있을 것 같은데, 서이제 식으로 그냥 가기로 한다. 서이제는 반복적인 문장들, 반복적이면서 슬쩍슬쩍 비트는 문장들로 농담을 시도한다. 농담은 직선적이지 않아서 은근히 다가오고, 그 은근함은 웃음이 되었다가 다시 질문이 된다. 이런 문장들에 익숙해지는 순간 독자는 이미 서이제의 프레임 안에 있다,
프레임, 픽셀, 정보값. 이런 단어들은 내게 익숙하지 않다. 안다고 하더라도 흐릿하다. 서이제의 소설들이 그 흐릿함을 벗겨내기 위한 시도라면, 나는 독자로서 실망했을 것이다. 서이제는 프레임을 묘사하지 않고, 프레임 안에 있다. 프레임 안에서 프레임 바깥을 본다. 역설적으로, 서이제는 프레임 안에 있지 않고 프레임 바깥에 있다. 프레임을 들여다본다. 테두리를 두르리고, 테두리를 정보값으로 묘사하고, 테두리를 픽셀의 단위로 본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테두리. 서이제의 소설 속에 존재하는 테두리들.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에는 이런 문장들이 나온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쓸데없는 문장들’인데, 예를 들어, “울거나 떼를 쓰거나 악을 써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울거나 떼를 쓰거나 악을 쓰는 건, 글로 쓸 수 없는 말이었을지도.” 그리고 또 이런 문장도 나온다. “그건 오랫동안 내가 고운 말만 쓰도록 길들여진 탓일지도 몰랐다. 사실 나도 한 번쯤, 나쁜 세상을 향해 나쁘게 말해보고 싶었다.” 글의 방식, 묘사의 방식, 그리고 말의 방식. 서이제는 글로 쓸 수 없는 것들에 주목하지만, 결국 글로 쓴다. 정보값을 얘기하지만, 서이제의 정보값은 결국 문장이다.
전작인 ‘0 프로를 향하여’에서 소멸해가는 장르들, 그와 함께 스러져가는 시대와 시절과 순간들을 훌륭하게 묘사했던 서이제는 이번 작품집에서도 여전하다. 잡을 수 없는 순간들의 이미지. 프레임안에 포착되면서 프레임 안에 고정된.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순간들. 포착되는 순간,이미 소멸되었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잔상. 잔상이어서 기억되고 고정되는 것. 이 역설의 순간들을 풀어내는 것이 서이제의 소설이다.
◇김동식·문학평론가
◊낮은 해상도로부터
우리의 일상에 자리를 잡게 된 지 30년이 다 되어 간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30년은 생물학적으로 한 세대를 성인으로 키워낼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다. 디지털 문명 전환과 함께 태어나서 공부하고 경험하면서 성장한 세대가 성인으로 자라났고, 그 가운데에는 자신의 세대적 경험과 감수성을 표현하는 소설가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가 서이제의 생물학적 나이를 알지 못하지만 소설집 ‘낮은 해상도로부터’를 읽었을 때 디지털 문명으로의 전환기에 태어나 자라고 글을 써온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바 있듯이, 소설집 ‘낮은 해상도로부터’는 디지털 미디어 테크놀로지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말은 디지털 중독이나 문화적 감수성의 편향성과는 무관하다. 우리의 삶은 미디어와 매개될 때 삶의 모습으로 가시화되고 경험된다는 것. 삶을 텍스트를 만드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란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매개하여 씌어지는 텍스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서이제의 소설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씌어진다. 표제작 ‘낮은 해상도로부터’는 SNS에서 갑자기 사라진 ‘너’에 대한 이야기이다. 애인보다도 속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지만, 나는 너에 대해서 어플리케이션 개발자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고 직장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알고 있지만 서로 만난 적도 없다. 얼굴도,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 관계 이상의 정서적 교감을 주고받는 관계가 유지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역설적으로 얼굴, 목소리, 성별, 이름, 지문 등과 같은 정체성의 지표들(또는 계급적 지표들)이 삭제된 상태였기에, 달리 말하면 서로의 정체성이 낮은 해상도의 화면처럼 흐릿해진 상태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너는 디지털 미디어 바깥의 그 어디인가에 분명히 있을 테지만, 찾을 수도 만날 수도 확정할 수도 없다. 서이제 소설들의 나는 말한다, 나는 미디어 속에 있다고. 넷플릭스, 인스타그램, 온라인 게임, 바이럴 마케팅, 블로그, 메타버스, 인공지능 기반 채팅, 유튜브 등의 미디어들은 내가 들어가 앉아 있게 될 현실이자 풍경일 것이다. 미디어와 매개된 정체성과 사실성을 포착해 내고 있는 문체(소설적 표현 방법)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충분히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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