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불신만” vs “역사에 남을 죄”…尹 ‘이태원특별법’ 거부권 행사 [뉴스+]
정부 “국민 분열·불신 심화시킬 우려”
與 “재협상하자” vs 野 “권력 남발해”
유족 “우리가 바란 것 오직 진상규명”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및 피해자 권리보장을 위한 특별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 9일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함에 따라, 정부는 해당 법안을 국회로 돌려보내 재의결을 요구하게 된다.
취임 20개월이 지난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건 이번이 다섯번째, 법안 수로는 9건째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양곡관리법 개정안, 간호법 제정안,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란봉투법), 방송 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서 구성하도록 한 특별조사위원회에 위헌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 총리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재의요구안을 심의하는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특별조사위가 운영돼야 한다면 헌법 질서에 부합해야 하나, 이번 법안에 담긴 특조위는 그 권한과 구성에서부터 이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한 총리는 “특별조사위에 부여된 강력한 권한이 헌법상 영장주의 원칙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할 소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이어 특조위 구성에 대해서도 “11명의 위원을 임명하는 절차에서 공정성과 중립성이 훼손될 우려가 상당하다”면서 “이 법안은 자칫 명분도 실익도 없이 국가 행정력과 재원을 소모하고, 국민 분열과 불신만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 총리는 “이태원 참사는 유가족과 피해자, 우리 사회 전체에 큰 상처를 남겼으나 그렇다고 해서 참사로 인한 아픔이 정쟁이나 위헌 소지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 총리는 유족·피해자 지원책과 관련해 “요청사항에 귀 기울이며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방안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겠다”면서 “조속히 일상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재정적, 심리적 지원을 확대하는 한편, 안타까운 희생을 예우하고 온전히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도 적극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앞서 국민의힘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해 야당에 재협상을 요구했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조사위원회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고, 여러가지 독소조항이 있기 때문에 의원총회를 거쳐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했다”며 “또 국회의장이 중재해서 여야 간에 협상이 90% 가까이 이뤄진 안과도 훨씬 동떨어진 안이라 재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어 “민주당이 재협상에 응하면 공정성이 담보되고, 전례없던 독소조항도 제거된다면 여야간 합의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익표 원내대표를 비롯한 원내대표단과 당 이태원참사특위 위원들은 서울광장 앞 분향소를 찾아 유가족과 면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오경 원내대변인은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거부권 행사에 반발해 당장 용산대통령실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유가족부터 위로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박주민 원내수석부대표는 페이스북에 “윤 대통령이 끝내 거부권을 행사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권력을 함부로 행사한 것”이라며 “윤 대통령이 국민과 역사에 죄를 지은 오늘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할 것”이라고 적었다. 4선 홍영표 의원도 페이스북에서 “지금껏 참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회피해왔던 윤석열 정부는 또다시 권력을 남발해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입을 틀어막았다”며 “특별법은 거부해놓고 ‘최대 배상 지원’을 운운하는 천박함까지, 진정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 정권”이라고 쏘아붙였다.
조오섭 의원은 "윤석열 정권의 거부권 사유는 말도 안 되는 거짓”이라며 “특조위 구성이 불공정하다고 하는데 유가족 측이 포함된 것이 어떻게 불공정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이어 “또 불송치, 수사 중지 사건 기록 열람이 독소조항이라는데 기존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부실하지 않았다면 특별법과 특조위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유가협)와 시민대책회의는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 관료, 국민의힘 의원들은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결정으로 역사에 남을 죄를 지었다”며 반발했다. 이들은 이날 오후 서울광장 분향소 앞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발표한 공식입장에서 “대통령의 거부권은 무제한으로 행사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라며 이렇게 주장했다.
이들은 “유족이 언제 재정적 지원과 배상을 요구했나”라며 “유족이 바란 것은 오직 진상규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유족의 요구를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묵살했다”고 비판했다. 이정민 유가협 운영위원장은 “지난 1년간 유족들은 우리 아이들이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원인 규명을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여 애원했지만 정부 여당과 윤 대통령은 159명의 희생자와 가족들을 외면했다”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정부가 유가족과 협의해 피해지원 종합 대책을 수립하겠다는데 참여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 위원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고 단 한 줌의 진정성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국회 재의결을 앞두고 여야와 협의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다시 한번 국회의원들에게 호소해볼 생각”이라며 “정부의 잘못을 부각하고 문제점을 찾아야 하는 곳은 국회”라고 답변했다.
김덕진 시민대책회의 대외협력팀장은 “진실을 찾지 않은 채 정부의 지원을 원하는 유족은 없다”라며 “유족 동의 없이 피해자 지원을 위한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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