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김앤장 - 청와대 - 외교부 - 행정처 협의’ 인정하고도…“재판 개입 없다” 양승태에 무죄

이혜리 기자 2024. 1. 30. 21: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법농단 1심, 앞뒤 안 맞는 판결
대법 앞 법원공무원노조 “양승태는 유죄”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조합원들이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무죄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centing@kyunghyang.com
일본 기업 대리한 ‘김앤장’
피해자들 승소 확정 우려
‘외교부 통해 대법에 의견서’
외교부·행정처 조율 과정서
행정처, 청와대 수시 연락
대법원장 ‘협의’ 인지했을 것
‘임 조언에 의견서 보완 지시’
조태열 장관 역할도 언급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사건을 심리한 1심 법원은 판결에서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외교부, 법원행정처, 일본 기업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 측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일본 기업 승소로 이끌기 위해 각종 협의를 한 사실을 인정했다. 피해자들의 승소 확정을 우려한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내기까지 조태열 외교부 장관(당시 외교부 2차관)이 한 역할도 언급했다.

3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5-1부(이종민·임정택·민소영)의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판결을 살펴보면, 재판부는 2014~2016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배 사건이 대법원 재상고심에 올라가자 당시 청와대와 외교부, 법원행정처, 김앤장이 여러 차례 접촉해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고 인정했다.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관계에 의하면, 김앤장의 한상호 변호사는 2014년 11월 김앤장 고문이던 현홍주 전 주미대사,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이 모인 자리에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문제점과 관련해 국무총리의 대통령에 대한 주례보고가 있었고, 대통령도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도 대법원에 얘기하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이를 계기로 김앤장은 일본 기업에 유리한 한국 외교부의 의견을 대법원에 제시하는 ‘법률 외적인 설득 방안’을 추진한다. 2012년 대법원 소부가 내린 피해자들 승소 판결을 재상고심에서 뒤집으려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사건을 회부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외교부가 피해자들 승소 확정 시 우려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현 전 대사와 유 전 장관은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과 여러 차례 식사하면서 정보를 파악한 것으로 판결에 나온다.

2015년 2월 김기춘 비서실장은 곽병훈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김앤장 변호사)을 불러 ‘외교부 요청으로 대법원에서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고 최근에 그 제도가 시행돼 외교부가 의견서를 제출하기로 했으니 잘 챙겨보라’고 지시했다.

한상호 변호사는 곽 전 비서관을 찾아가 김앤장이 작성한 강제징용 사건의 상고이유서와 쟁점 요약 문건을 전달했다.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김앤장, 외교부, 청와대와 수시로 연락하며 의견서 제출 방안을 논의했다.

외교부가 여론 악화 등을 이유로 의견서를 제출하지 않자, 청와대와 임 전 차장은 외교부에 독촉을 하기도 했다. 임 전 차장은 김앤장으로부터 초안을 받아 수정 의견을 줬다. 외교부가 의견서 내용과 제출 시기를 법원행정처와 조율하는 과정에서 조태열 현 외교부 장관의 이름이 등장한다. 조 장관은 2015년 당시 외교부 2차관으로 임 전 차장을 만나 절차를 직접 협의했다. 조 장관은 실무자들에게 임 전 차장 조언대로 의견서를 보완하라고 지시했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강제징용 사건을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등의 사건 결론과 외교부에 대한 절차적 배려 방안 등을 검토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검찰은 사법부 이익 도모를 위해 구체적인 사건의 재판 결론과 절차를 검토하는 것 자체가 사법행정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한다면서 양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죄로 기소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법원행정처 문건들을 놓고 ‘재판 개입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작성된 게 아니라면 위법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댔다.

판결을 보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외교부·김앤장의 협의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변호사는 2015년 5월과 11월, 2016년 10월 사석에서 양 전 대법원장을 만나 ‘외교부가 소극적이어서 걱정이다’ ‘김앤장에서 외교부 의견서 제출 촉구서를 대법원에 제출하겠다’ ‘촉구서를 제출했다’는 등의 말을 했다. 임 전 차장은 2016년 9월 의견서 제출을 논의하러 외교부에 간다고 양 전 대법원장에게 직접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한 변호사의 말에 양 전 대법원장이 ‘그러냐, 잘 알겠다’ ‘잘되겠지요’ 정도로 답해 크게 호응하지 않았다고 봤다. 임 전 차장의 직접 보고에도 양 전 대법원장이 ‘외교부가 의견서를 내기는 한대?’라고 말해 의문을 표했을 뿐이라고 했다. 재판부는 강제징용 사건과 관련해서는 직권남용도, 공모도 없었다며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