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운동권 경제학’
1980년대 대학에 입학해 제일 먼저 이름을 안 경제 저술가가 박현채였다. 학과 선배들이 세미나와 MT 때 읽어오라고 콕 찍어준 필독서가 리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와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의 ‘민중과 경제’였기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자인 조순 등은 그보다 나중에 알게 됐다. 박현채는 ‘민족 경제론’을 주장했는데 한국 경제를 ‘식민지 종속형 자본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궁극적 지향점을 ‘미국 경제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자립 경제’라고 했다.
▶“386 세대가 경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가 청와대와 여당의 386 운동권 출신에게 일침을 놨다. 대학 시절 습득한 ‘운동권 경제학’의 좁은 시야로 온갖 정책에 관여하다 보니 경제 부총리로서는 황당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80년대 운동권 경제학의 인기 저자였던 박현채(1934~1995) 교수는 빨치산 경험, 인혁당 사건 연루 등의 이력 때문에 오랫동안 재야에서만 활동하다 1980년대 후반에 뒤늦게 조선대 교수로 채용됐지만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는 이른바 ‘학현학파’ 출신들이 중용됐다. 분배 경제학을 중시한 고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의 ‘학현연구실’과 인연 있는 경제학자들이다. 노무현 정부의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문재인 정부의 홍장표 경제수석, 강신욱 통계청장 등이 학현학파로 꼽힌다. 변형윤 교수는 1980년 시국 선언으로 해직 교수가 됐을 때, 제자이자 서울대 경제학과 후배인 박현채씨가 “소주 한잔 하십시다. 등산하러 가십시다” 하고 불러내 위로해 준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고 둘 사이의 남다른 인연을 얘기했다.
▶운동권 출신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1인당 국민소득이 IMF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가 됐다”며 윤 정부의 ‘경제 파탄’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경제학자 출신의 윤희숙 전 의원이 “희한한 일. 작년 숫자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 되레 마음이 짠해진다”고 반박하면서 말만 앞서고 경제 현실에 무지한 ‘운동권 경제학’을 정치판 화두로 떠올렸다.
▶지난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 ‘반일(反日) 죽창가’는 분배 중시, 반미·반일의 민족 경제론 같은 이른바 ‘운동권 경제학’의 문제의식에 뿌리를 둔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경제 좌우명으로 삼는다는데, 현실에서는 가슴만 뜨겁지 머리는 냉철하지 못해 집값 폭등의 불로소득 주도 성장, 분배 악화, 통계 조작 같은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운동권 세대와 함께 철 지난 ‘운동권 경제학’도 이제는 청산해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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