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은 구겨져 있었다 [1인칭 책읽기: 세 개 이상의 모형]
김유림 시인의 「세 개 이상의 모형」
접혔다 구겨진 시집의 한 쪽
마음이 가면 따라 오는 것들
경주의 한 책방에서 김유림 시집 「세 개 이상의 모형」을 만났다. 책들이 가득 모여 있는 곳에서 꺼내든 시집은 23~33쪽에 접혔다 펴진 구김이 남아 있었다. 책끝에서 책등 쪽으로 접혔다 펴진 것으로 보아 제조 과정에서 구겨진 것이었다.
새 책은 어떠한 구김도 없어야 상품 가치가 있다. 하지만 조각칼로 그은 것처럼 구김이 졌다는 건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뜻이다. 시집의 구김은 23쪽 '나의 마음'에서 시작해 33쪽 '너의 의미'로 끝났다. 김유림의 시는 다솜했다. 꾸밈도 없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새것 같지 않은 시집의 구김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수년간 시집을 의무처럼 읽었다. 문학전문언론사를 차리자 사랑했던 것이 일이 됐다. 사랑하던 게 의무로 다가왔을 때 오히려 거리가 멀어진 것들이 생겼다. 나는 그런 것들을 꿋꿋이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일주일에 시집 두 권, 책 한 권, 영화 한 편을 볼 것. 사랑을 의무로 바꾸는 루틴들. 해치우듯 읽고 또 보고 나면 나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물으면 답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이 무엇이었더라?
물론 사람도 글도 책도 일도 모두 자연스럽게만 돌아가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마음을 다하면 함께 오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차로 4시간을 달려 만난 시집에는 우연한 구김이 있었다. 그 구김에서 좋은 시를 만났다. 근육이 이완하듯 그 자연스러움이 좋았다.
김유림 시집의 시들은 모두 대학에서 배웠던 시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예창작과에서는 시를 깎아 일종의 조각을 하는 행위를 한다. 문단에서 인정받는 글은 복잡하고 빳빳해야 한다. 새로 만들어진 책의 페이지처럼.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예창작과 실기 입시를 위해 시를 조각하는 법을 배웠으니 김유림 시집에서 느끼는 위화감은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 속 경주는 불편한 시끌벅적함이다. 수학여행의 대표적 코스였던 불국사 인근에 학생들을 가득 채운 버스가 기념품점 앞에서 멈추기만 하면 건강식품이라며 유자청을 아이들에게 팔려고 호객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선생님과 떠드는 아이들이 뒤섞여 거대한 소음을 만들었다. 수학여행 이후 업무가 아니면 경주를 애써 찾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난 뜻밖의 인연을 만났다. 김유림의 구겨진 시집이었다. 5분 거리에 죽은 왕들의 무덤이 가득한 곳에 위치한 서점은 주인장의 취향과 색이 가득 묻어 있었다. 거기서 만난 김유림의 시집은 내게 '새로운' 경주가 됐다.
이제 경주를 대변하는 건 불편하게 시끌벅적했던 불국사가 아닌 '힙한' 황리단길이다. 마치 홍대 한복판처럼 힙해진 이곳은 새로운 관광지였다. 그곳에서 만난 작은 서점에는 생각지 못한 작은 인연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선물로 줄 시집을 찾다 만난 시집의 구김이, 경주에 있었다.
2024년 이제 35살이 됐다. 아직 기억력이 약해질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문학을 왜 좋아하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애란, 하성란, 기형도, 손택수, 신경숙…. 필사했던 책들의 작가들을 생각하다가 글을 쓰면 설레던 순간들을 생각해본다.
문학을 좋아했었다. 그러다가 좀 미워졌었던 것 같다. 이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없는데 그러다 만난 김유림 시인의 시구 하나가 마음에 남았다. 마음을 가지면 말이 온다. 마음을 가지면 함께 온다. 생각보다 크고 검은 것이 함께 쓸려 들어온다.
이민우 문학전문기자
문학플랫폼 뉴스페이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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