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나보다 더 힘드신 분들을 위한 배려”라는 말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어쩐지 나는 이곳 어디서도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첫 책을 내고 난 뒤에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떠돌아다녔고 처음으로 강력한 연결감을 느낀 곳은 독일 베를린이었다. 그곳엔 각자의 이유로 모국으로부터 망명한 많은 이주민들이 있었다. 독일이 저지른 가해의 역사를 스스로 들여다보고 기억하느라 다소 분열적인 느낌마저 주는 곳이었다.
나는 종종 추방당했다고 느낀다. 베를린이 아니라 서울에 있을 때 그 감각은 뚜렷하다. 같은 언어와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데도 이곳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환영하지도 내가 성장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려 할수록 있는 힘을 다해 다른 방향으로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다는 것을, 높은 자살률과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 유병률이 말해주는 듯하다.
모국에 대한 애착은 여전해서 수개월에 한 번씩 돌아와 머문다. 철새처럼 이동하며 다닐 때의 장점은 매번 새로운 눈으로 공간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서경식이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말하듯, “고정되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도 그것을 보는 쪽이 불안정하게 움직일 때는 달리 보인다. 다수자들이 고정되고 안정적이라고 믿는 사물이나 관념이 실제로는 유동적이며 불안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소수자의 눈에는 보인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살아갈 때는 여성이란 정체성이 중요했지만 독일에 가면 동양인이란 정체성이 더 눈에 띄며, 독일에서 나고 자란 백인 여성보다 베트남 이민 2세 남성에게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또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왜 서구와 관련된 걸 더 세련되게 생각해왔을까? 왜 사람들은 한국의 문제에 대해 백인 남성이 답하면 신뢰할까? 왜 서점에는 우리처럼 식민지 역사를 겪은 다른 국가의 책이 이토록 한정적일까? 이런 질문을 안고 돌아와 강남역 앞 테헤란로를 걷다 보면 커다란 전광판에 띄워진 광고를 보게 되는 것이다. 파운데이션 화장품을 소개하는 광고판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를 보태 노랑을 누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띄워지는 백인 여성의 얼굴.
언젠가 지하철을 탔는데 이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주변을 둘러보시고, 임산부나 교통약자가 계시면 자리를 양보하는 여유를 가져 보심이 어떨까요? 모두가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드신 분들을 위한 배려는 우리 모두를 기분 좋게 합니다.” 언뜻 평범하게 들리는 이 문구가 내게는 무척 충격적으로 들렸다. 첫째로 “모두가 힘들지만”이라는 당연한 전제에서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누적된 피로가 느껴졌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나보다 더 힘드신 분들”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고통은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라 수량화해서 타인의 것과 나의 것을 비교할 수 없다. “당신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다”는 말은 대체로 위로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불행을 경쟁하게 만든다. 안내방송은 지하철을 탄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말하는 듯했다. “너만 힘들어? 다들 힘들어. 분위기 망치지 마.” 자신의 고통이 인정받지 못하고 엄살로 치부될 때 사람들은 억하심정을 갖고 타인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는다. 교통“약자”를 배려하는 일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고통은 그것이 마음의 통로가 되어 타인과 연결되게 만들 수도 있고, 자기 안에 갇혀 고립되게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사건을 얼마나 잘 애도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 전쟁 이후 수없이 벌어진 각종 참사와 비극들이 제대로 애도되지 못하고 유령처럼 한국 사회를 떠도는 것을 본다. 개개인의 고군분투, 알코올 중독이나 쇼핑 중독, 각종 항우울제와 마음 챙김 등을 넘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결감을 회복할 방법은 뭘까? 우리는 뭘 잃어버린 것일까?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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