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칼럼] 김정은의 ‘헤어질 결심’, 의미와 대처방향
연초부터 북한의 새로운 대남노선이 한반도에 전운을 몰고 왔다. 북한 지도자 김정은은 “불신과 대결만을 거듭해온 쓰라린 북남관계사를 냉철히 분석한 데 입각”했다며 기존 통일정책을 포기하고 영구분단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한반도에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가 병존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모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대남노선 전환의 의미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북한은 ‘남한과의 통일’을 지향하지 않고 ‘남남’으로 살아가겠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그동안 남북이 공유해온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남북관계 인식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러한 반전은 윤석열 정부와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감정적으로 표출된 양 보이지만, 기실 북한이 꽤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이다. ‘우리민족제일주의’ 대신에 ‘우리국가제일주의’를 대대적으로 고창하고, 남한을 ‘대한민국’이라 호명한 것 등이 두 개의 국가론을 다지는 포석이었다. 김정은은 남북한 간 체제의 차이와 역량 격차가 극명한 속에서 장기적으로 ‘백두혈통 정권’의 지속을 위해 이 길을 택했을 것이다.
둘째, 북한은 ‘두 개 국가의 병존 정책’을 현실화하는 차원에서 대남 혁명공작 분야를 폐지하였다. 북한은 이미 대남적화 관련 조항을 노동당 규약에서 삭제한 데 이어 이번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민족경제협력국 등의 국가기구와 대남 접촉기구들을 폐지하였다. 대남 선전공작을 해온 평양방송의 송출도 중단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는 김여정 부부장의 대남 담화(2022년 8월19일)의 맥락과 상통한다. 김정은이 남한과 확실하게 ‘헤어질 결심’을 한 것이다.
셋째, 북한은 남북관계를 사실상 전쟁 중인 ‘가장 적대적인 관계’로 규정하였다. 김정은의 ‘헤어질 결심’이 경착륙한 것으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아마 남북관계가 비적대적 관계로 전개되었다면, 김정은은 남한과 평화협력을 추구하며 장기적으로 두 개의 국가병존으로 나아가는 연착륙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급격히 적대적 방향으로 흐르면서 반대 결과가 나타났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남북이 몰두한 팃포탯(tit for tat) 대결이 남북군사합의서의 파기로 이어지고, 무력충돌의 위험성을 키운 가운데 ‘가장 적대적인 국가’ 규정이 나온 것이다.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 먼저 북한의 두 개 국가론은 한반도 미래에 중대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렇다고 기존 관념에 바탕을 두고 즉각 대응할 일은 아니다. 중장기적으로 내부 숙의를 거쳐 합리적 대처방안을 찾아야 한다. 당장 절실한 건 ‘가장 적대적 관계’에서 터져 나올지 모를 전쟁 혹은 무력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 수립이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작다. 그들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전쟁을 도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군은 세계 최강의 미군과 연합전력을 구성하고 있으며, 재래식 군사력 면에서는 북한군을 압도한다. 그래서 전쟁을 입에 달고 다니는 김정은도 “적들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결코 일방적으로 전쟁을 결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제를 단다. 북한군 내부도 작년보다 더 많은 병력이 경제건설 현장에 투입되는 것 말고, 특이동향은 감지되지 않는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먼저 휴전선이나 북방한계선에서 충돌이 발생하고, 그것이 관리되지 못하면서 확전되는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군사분계선에서 남북 충돌을 막는 일이 시급하다. 우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내뱉는 거친 언사와 위협적 행동부터 즉각 중단해야 한다. 북한이 먼저 할 리 만무하니 우리부터 해야 한다. 그러면 충돌은 막을 수 있다.
오늘의 위기조성에 큰 영향을 미친 윤석열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에 대해 많은 국민이 우려한다. 이번만큼은 국가 명운이 걸렸으니 절제된 판단력으로 국민 불안을 해소하고 한반도 리스크도 덜어주길 바란다. 국회도 적극 나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 충돌 방지를 위해 소임을 다해야 한다. ‘한반도 전쟁 반대’나 ‘남북 충돌 방지를 위한 조치 마련 촉구’ 결의안 등을 제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며, 전쟁을 가벼이 여기는 시각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수백만 명의 국민이 죽어 나가고 한국 경제·사회가 후진국의 나락으로 떨어진 뒤, 핵먼지를 뒤집어쓴 채 얻은 승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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