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양심수·노동자 지원에 50년 헌신한 ‘일본의 양심’ 이시이

한겨레 2024. 1. 3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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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이시이 히로시 ‘한국 양심수 지원 전국회의’ 사무국장을 추모하며
고인이 지난해 7월 정전 70주년을 맞아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광장 인근에서 연 한반도 평화대회 ‘전쟁 위기를 넘어, 적대를 멈추고 지금, 평화로!’에 참석해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 이옥분씨 제공

50년 가까이 재일동포 및 한국 시민들과 발걸음을 함께 했던 이시이 히로시 ‘한국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 사무국장이 지난 26일 도쿄에서 타계했다. 3년 전 도쿄에서 나가노현으로 이사한 고인은 한국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사흘 일정으로 도쿄에 왔다가 호텔 숙소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향년 74.

고인은 숨지기 하루 전까지도 한일 시민연대 행사에 잇따라 참석했다. 그는 25일 오후 일본 중의원 제2의원회관에서 일본 시민단체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전국행동’이 주최한 ‘국익보다 인권! 일본군 위안부 서울고법 판결의 의의’ 행사에 참석했다. 지난해 11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물은 서울고법 판결을 끌어낸 한국 변호인단을 초청해 그 의미를 되새기고, 일본 정부에게 판결 수용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이어 저녁에는 일본 기업인 닛토덴코의 구미 공장 청산에 항의해 싸우고 있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모임의 결성집회에 참석했다. 27일에는 제주 4·3항쟁 76주년 도쿄 행사를 위한 준비모임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처럼 그는 평생을 한국의 양심수와 노동자 등 약자들과의 연대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다. 양심수를 위한 후원모임이나 한국 노동자들의 원정투쟁 지원, 강제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관련 행사, 3·1운동이나 4·3항쟁 관련 모임 현장에는 굵은 눈썹을 가진 백발의 노신사가 늘 자리를 지켰다. 장기간 일본 원정 투쟁을 벌였던 한국산연 출신의 김은형 민주노총 경남본부장은 “한국산연이 끝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시민 200여명이 현지에서 우리의 싸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본사와의 협상을 도와준 덕분이다. 특히 이시이 선생은 거의 매일 현장에 찾아와 함께 투쟁한 분이다. 갑작스런 부고에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75년 간첩조작 피해자 지원 활동 이후
최근까지 노동자 등 약자들과 연대
지원 위해 한국 찾은 횟수만 200회
생전 인터뷰서 연대 활동 이유 두고
“일본 학교서 근현대사 잘 안 가르치니
우리라도 일 식민지배 등 문제 알려야”

26일 도쿄서 뇌출혈로 갑작스레 별세

고인이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1975년 중앙정보부의 유학생 간첩단 조작사건(11·22사건)으로 구속된 재일동포 유학생 이철(75)씨 구원운동에 참여한 것이 계기였다. 이씨와는 전혀 안면이 없었지만, 규슈 구마모토의 고교 1년 선배가 겪는 억울한 얘기를 동창생한테 듣고는 이철 구원회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는 생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씨가 납치당하는(1973년 8월) 등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박정희 정권한테 심한 일을 당하던 때여서 이철 선생도 독재정권의 희생양이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 선배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구원활동에 동참했다”며 “사형 선고를 받았던 그가 무사히 석방되고, 재심에서 무죄가 되는 걸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2019년 도쿄 오타구 이케가미역 부근의 한 건설현장에서 안전관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시이 사무국장. 고인은 이렇게 돈을 벌어 한-일 시민교류 활동 경비로 썼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철 구원운동으로 시작된 그의 활동 폭은 재일동포 양심수 전체를 위한 운동과 한국 정치범을 위한 운동으로 넓어졌고, 자연스레 한국 시민사회와의 연대 활동으로 이어졌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그가 한국에 다녀간 횟수만도 200회가 넘는다. 다음 달에도 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인 고 최창일씨의 재심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서울에 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한국에 와도 고궁이나 관광지 등을 찾거나 개인적 휴가를 즐긴 적이 없다고 한다. 몇 년 전 한국인 친구 이옥분씨의 초청으로 이씨의 삼척 집을 찾아 며칠 머문 것이 한국에서의 첫 여가 시간이었다. 삼척에서 화력발전소 반대 등 시민운동을 하는 이씨는 “오랫동안 한국을 위해 애써 온 이시이씨와 동료들을 초대했더니 고마워하면서 그동안에는 감옥에 갇혀 있는 친구들 생각에 한국에서 다른 여유를 가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고인은 정년 퇴직 뒤 연금으로 부인과의 가계를 꾸려 나가면서도 건축 현장 허드렛일 등으로 경비를 마련해 한일 시민연대 활동을 계속해왔다. 2019년 3월 ‘한국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를 취재하러 도쿄에 갔을 때 필자는 한 주택 신축 공사장에서 교통안전원으로 일하던 그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는 한일 연대 활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느니 운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거의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라도 나서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와 ‘위안부’, 징용 문제 등을 젊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 한-일 시민들도 민간교류를 통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그렇게 한발씩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장례식은 오는 2일 도쿄의 기리가야장례식장(桐ケ谷斎場)에서 열린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종철/서강대 신문방송학과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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