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차라리 저출생 대책을 없애자

한겨레 2024. 1. 3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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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소득, 건강 기대수명, 관용 등 항목은 별 차이가 없다. 반면 사회적 지지, 삶의 선택에 대한 자유, 부정부패 인식에서 차이가 크다. 각자도생·무한경쟁 하며 사는 한국인은 어려울 때 믿고 지지해주는 벗, 친지가 거의 없다. 최상위 국가들에서 정규직의 안정성과 비정규직의 고임금은 ‘선택’의 문제다. 한국에서는 승자인 정규직이 특권을 독점하고 패자인 비정규직은 영구히 차별받는 ‘운명’의 문제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조형근 | 사회학자

교양과학책 읽기를 좋아한다. 통찰력 가득한 진화생물학 분야 책들이 특히 재미있다. 가끔은 ‘현타’가 오기도 한다. 진화생물학의 전제는 모든 생명체가 본능에 따라 생존과 번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원시의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된 이 본능이 수십억년 동안 유전자 복제를 통해 이어지고 진화한 결과가 나라는 존재라니 신비하다. 그리고 나는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이 장구한 진화의 사슬을 끊었다. 문득 억겁의 세월 동안 번식을 위해 발버둥 쳤을 내 앞의 수많은 유전자 조상님들께 미안해진다. 잠시 묵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온 나라가 초저출생의 재앙 앞에 난리다. 조만간 나라가 소멸한다며 야단법석이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는 한국의 인구 감소가 흑사병 때 중세 서양보다 빠르다고 경고하는 칼럼도 실렸다. 0.7 수준인 합계출산율은 역사적 사례를 찾기도 어렵다고 한다.

일찍이 20세기 말 번식을 포기한 나는 뜻하지 않게 이 재앙의 주범 중 한명이 됐다. 엄중한 경고나 고상한 훈계보다는 ‘범행’ 동기를 자백해야 할 처지다. 결혼 무렵 나와 처는 대학원생이었다. 알바로 살았다. 그래도 결혼은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양가 도움에 처의 저축을 보태 달동네 꼭대기에 셋집을 얻었다. 자취 살림을 합쳤고, 총액 40만원으로 혼수도 마련했다. 자취방 같은 신혼집에서 투닥투닥 그럭저럭 살았다.

아이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양육이 순전히 가족 몫이다 보니 누군가 일과 공부를 그만두지 않으면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 딸의 경력 포기가 안타까운 여성 쪽 부모가 아이를 맡아 키우는 경우가 많았다. 남성 쪽 부모가 나서기도 했다. 노인들 허리가 휘었다. 양쪽 부모님 모두 ‘자기 착취’ 수준의 과로에 시달리는 자영업자이던 우리에겐 그마저 불가능했다. 아이 낳지 않겠다는 우리를 부모님들은 한번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워했을 뿐.

무엇보다 미래가 불투명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자 선배들이 말렸다. “집이 부자냐?” 진지하게 묻기도 했다. 미국 박사가 아니면 정규직이 못 된다며, 한국 학계의 식민성 극복 같은 배부른 소리는 집어치우고 유학 가라는 조언이 많았다. 유학 자체를 비판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척박한 땅에 남는 이도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처 앞의 현실은 더 엄혹했다. 여성이 대학원생의 절반을 넘겼지만, 여성의 전임교수 임용은 기적이었다. 우리에게는 끝 모를 불안정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야 선택한 삶이지만, 알바인 채 부모가 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예외였을까? 아니다. 2000년대 초중반이던가, 문상을 갔는데 30대에서 40대 중반쯤 대학원 선후배들이 같이 앉게 됐다. 누군가 놀란 듯 외쳤다. “여기 열여섯명인데, 낳은 아이가 네명이야.” 비혼도 많고, 공부하는 맞벌이 부부도 많았다. 대부분 비정규직이었다. 이렇게 소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며 웃었던 것 같다. 함께 사라지고 있다는 감각이 묘하게 슬펐다.

우리가 결혼과 출산을 단념한 건 어쨌든 선택이었다. 지금의 청년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건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운명이다. 저출생 대책에 해마다 수십조원을 들인다고 한다. 좋은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청년은, 여성은 아이 낳는 기계가 아니다. 당신의 부모가 노동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당신을 낳은 게 아니듯, 청년들도 조국의 경제 성장과 복지 비용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려고 사랑하는 게 아니다. 적절한 유인을 제공하면 자극에 반응해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오싹하다. 왜 아이를 낳지 않을까? 저출생 대책 따위나 세우는 세상이 무서운 탓이다.

아이 낳으라 말하는 대신 아이 낳을 만한 세상인지 물어야 한다. 유엔 산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가 발표한 2023년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도는 137개국 중 57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에선 35위다. 최상위권은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등 북서유럽 복지국가들이다.

2017~2019년치 조사에 기반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 ‘한국인의 행복과 삶의 질에 관한 종합연구’(2021)의 국제 비교가 상세하다. 이때 한국 순위는 153개국 중 61위, 오이시디에서 35위였다. 보고서는 최상위 국가들과 한국의 행복도 차이를 분석한다. 1인당 소득, 건강 기대수명, 관용 등 항목은 별 차이가 없다. 반면 사회적 지지, 삶의 선택에 대한 자유, 부정부패 인식에서 차이가 크다. 각자도생·무한경쟁 하며 사는 한국인은 어려울 때 믿고 지지해주는 벗, 친지가 거의 없다. 최상위 국가들에서 정규직의 안정성과 비정규직의 고임금은 ‘선택’의 문제다. 한국에서는 승자인 정규직이 특권을 독점하고 패자인 비정규직은 영구히 차별받는 ‘운명’의 문제다. 보고서에 따르면 행복의 불평등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불행하다. 행복의 불평등도가 높은 한국은 불행한 사람들의 행복도를 높이는 것이 전체 행복도를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현 정부와 보수세력의 생각은 많이 다른 것 같다. 한국인이 불행한 것은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근로시간이 여전히 오이시디 최장 수준이지만 한국인에겐 쉴 자격이 없다. 더 일하라며 ‘노동개혁’을 추진한다. 복지예산 비중이 오이시디 평균의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보조금은 줄이고 없애겠단다. 허리띠 바짝 죄고 더 가열차게 경쟁해야 한다. 보수세력만의 문제일까? 시험 안 거친 비정규직이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정규직과 같은 처우를 받는 건 못 보겠다는 ‘민주시민’도 드물지 않다. 연대를 외치던 입으로 차별을 옹호한다. 그렇게 함께 지옥을 만든다.

차라리 저출생 대책이라는 말이 없어지면 좋겠다. 좋은 정책도 저 프레임에 담기는 순간 그냥 성장을 위한 수단이 된다. 축적을 위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려는 시도가 된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무엄한 대접을 받다 보면 인간 쪽도 대책을 세우기 마련이다. 영겁의 세월 동안 이어온 본능의 법칙을 끊어버리는 결단으로 응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엄하다. 서로 존중하는 삶,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행복한 세상이 오면? 젊은이들은 알아서 사랑할 것이다. 뜨겁게 사랑할 것이다. 아이야 낳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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