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0쪽... 백과사전 두께 양승태 판결문에 담긴 '무죄의 이유'

이근아 2024. 1. 30. 18: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법농단' 의혹 1심 판결문 분석]
'핵심' 직권남용죄 설명만 60쪽에 달해
①권한 유무 ②남용 여부 ③의무 없는 일
이 중 하나라도 충족 안 되면 '무죄' 판단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를 받았지만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선고 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행정권을 남용하고 재판 독립을 침해한 혐의를 받은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렇지만 '무죄'의 뜻은 유죄 입증이 안 돼 형사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지, 아예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부장 이종민)도 일부 사건에서 "부적절한 재판 개입"이 있었다면서, 그 근거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데, 있어서는 안 될 '재판 개입'이 존재했음에도 왜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것일까. 한국일보는 30일 확보한 판결문을 통해 대법원 수뇌부의 재판 개입이 인정됐음에도 무죄가 선고됐던 세 가지 사건의 경과를 짚어봤다.

헌정 사상 최초로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섰던 '세기의 재판'답게, 이 판결의 선고 시간은 4시간 27분, 판결문 분량만 A4 용지로 3,160쪽에 달했다.


고영한 '재판 개입' 인정됐지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혐의를 받은 고영한 전 대법관이 2019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부적절했다"고 강조한 대표적인 판결 개입 사례는 2016년 11월 고 전 대법관의 ①'부산고법 판사 비위 은폐' 관련 사건이다. 2015년 초 법원행정처는 부산고법의 문모 판사가 지역 건설업자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인지했다. 2016년 11월 문 판사가 건설업자 관련 재판 내역을 외부에 전달한 것 같다는 의혹이 행정처에 전달됐다. 당시 부산고법에선 건설업자 관련 항소심이 진행 중이었는데, 고 전 대법관은 부산고법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소심 재판장에게 문 판사가 2017년 초 사표를 내니 그 이후에 선고를 해달라고 전하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를 "부적절한 재판 개입을 요청한 행위"라고 판시했다. △유무죄뿐 아니라 재판 절차도 핵심 영역이라 재판부가 결정해야 하고 △절차 공정성도 재판 신뢰에 중요한 요소이며 △선고 연기 요청이 자칫 사건의 결과까지 재고하란 요청으로 오인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란. 그래픽=박구원 기자

하지만 고 전 대법관은 무죄를 받았다. 이유는 재판부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에 깐깐한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직권남용죄 관련 일반적 쟁점에 대한 판단' 목차를 따로 만들어 60쪽을 할애했다. 관련 법리 설명 뒤 피고인들의 직무권한에 대한 판단을 내렸다. 긴 설명을 요약하자면 ①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에서 ②직권을 남용해 ③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또는 ④다른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해야만 직권남용죄가 성립된다. ①부터 ③ 또는 ④까지 차례로 충족해야 한다.

부산고법 사건에서 재판부는 우선 고 전 대법관의 요청이 재판장에게 구체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봤다. "재판 개입 시도가 요청에 그쳤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설령 재판장에게 전달됐다고 하더라도'라는 가정법을 쓰면서 한발 더 나아가 판단을 했다. △고 전 대법관에게 재판에 관여할 일반적 직무권한이 존재하지 않고 △재판장의 법과 양심에 따른 독립된 재판권 행사가 방해되지 않았으며 △재판부가 규정을 준수해서 재판 절차를 진행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지도 않았다고 봤다. 당시 재판장이 "내 책임하에 재판만 잘하면 돼 부담 느낀 바 없다"고 말했던 증언이 근거가 됐다. 이 사건만 봐도 법원이 직권남용죄의 요건을 얼마나 까다롭게 적용했는지 알 수 있다.


이규진 재판 개입 인정했지만 '무죄'

박병대 전 대법관이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선고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2016년 헌법재판소와 중복 심리하게 된 ②매립지 귀속 분쟁 관련 사건 중 일부를 조기 선고하라며 재판에 개입한 사건도 그렇다. 실제 실행은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했지만, 재판부는 고 전 대법관이 보고를 받고 결정해 재판 개입에 가담했다고 봤다. 그러나 고 전 대법관은 대법관 재판 개입과 재판연구관 사건의 심리 및 재판 조사·연구 업무에 대해 직무 권한이 없다고 봤다. 직권이 없으니 남용할 수도 없다는 논리다.

행정처가 ③2015년 한정위헌(헌법재판소가 법률 조항에 대한 법원 해석이 위헌이라 판단하는 것)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한 서울남부지법 재판부에 직권 취소 및 재결정 의견을 전달한 사건도 재판 개입으로 인정됐다. 이 전 상임위원의 부탁을 전달 받은 주심법관은 "사실상 결정된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며 동의한다.

하지만 재판부는 "박병대 전 대법관은 이 전 상임위원이 개입하는 행위를 하도록 '결정했다'"고 판시했지만 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박 전 대법관이 직권 취소를 직접 지시한 게 아니라, 추가 검토를 취지로 '그냥 둔다'는 안을 포함한 보고서를 보고 받은 점에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관련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스1

자연히 두 대법관의 상급자인 양 전 대법원장 역시 '범행 가담'이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문제의 세 사건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대체로 하급자의 조치가 취해진 뒤에 보고받았다고 판단하고, 가담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주심 대법관의 재판권과 대법원 연구관의 조사·연구 업무에 대해, 양 전 법원장에게 일반적 직무권한 자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도 더해졌다.

권한이 없으니 남용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재판 개입이 실제 있었음에도 정작 사법행정권을 지휘·감독하는 대법원장이 무죄를 받았던 것은 이런 논리에 따라 가능했다.

이근아 기자 galee@hankookilbo.com
박준규 기자 ssangkkal@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