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나라·신념·가족…지키기 위해 떠났다[미얀마 쿠데타 3년, 매솟을 가다①]
나라는 외세에만 뺏기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 집단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도리어 자국민을 학살하는 일이 미얀마에서 만 3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전 지구적으로 쿠데타는 흔하지만, 국민이 ‘봄 혁명’이란 이름 하에 조직적으로 무장해 군부와 전쟁을 벌이는 미얀마와 같은 나라는 드물다.
어느덧 4년 차에 접어든 이 싸움에서 낙관은 이르다. 다만 최근엔 소수민족 무장단체와의 전투에서 군부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어, 올해 반군부 진영이 거둘 성과에 관심이 쏠린다.
미얀마 국민은 군부를 상대로 수십 년 동안 투쟁했다. 이번에 군부를 뿌리 뽑지 못한다면 다음 기회는 없으리라는 불안과 각오가 팽배하다. 혁명에 나선 미얀마인들이 꿈꾸는 ‘끝’은 어떤 모습일까.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 위해 태국 속 ‘작은 미얀마’라고도 불리는 서부 국경 도시 매솟에서 지난 16일부터 23일까지 머물렀다. 매솟에서 만난 미얀마인들은 군부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전한다.
가는 철조망이 모에이강을 동서로 가른다. 발을 딛고 선 이쪽은 강의 동편인 태국 매솟, 건너편 서쪽은 미얀마 미야와디다. 지난 21일 매솟 시내에서 서쪽으로 달려 모에이강 국경에 도착했다. 철조망 너머 쓰레기로 가득 찬 마른 강바닥과 미얀마 주민들이 사는 허름한 나무집이 훤히 보였다. 강을 따라 형성된 국경 시장에서는 미얀마 상인과 태국 행인이 철조망 너머로 상품과 돈을 주고받았다.
이렇듯 미얀마와 가까이 붙어있는 매솟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미얀마에 정치·경제적 위기가 불거질 때면, 모에이강을 건너 매솟으로 오는 미얀마인은 늘어나곤 했다. 한때 매솟의 태국인 인구가 10만명이라면 미얀마인 인구는 20만명이라는 비공식 추계가 있을 정도였다.
2021년 2월1일 발생한 미얀마 군부 쿠데타는 또 다른 난민 물결을 낳았다. 매솟은 미얀마의 시민불복종운동(CDM) 참가자, 지명수배된 활동가, 야당 정치인, 시민방위군(PDF), 탈영한 군인, 군부의 탄압으로 재산을 잃은 사람 등의 목적지가 됐다. 정확히 몇 명이 넘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쿠데타 이후 매솟 내 상점과 집의 월세가 큰 폭으로 올랐다는 말도 있다.
이곳 매솟에서 미얀마를 떠났으나 미얀마로부터 도피하지는 않은 이들을 만났다. 인터뷰에서 이들은 쿠데타 이후 목숨을 걸고 매솟으로 넘어오게 된 이유를 들려줬다. 사연은 제각각이었지만 자신의 목숨, 가족, 명예, 신념 그리고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떠났다는 점은 같았다. 이들은 불안정한 체류 여건 속에서도 ‘봄 혁명’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나는 군대의 ‘수박’이었다”
“나는 ‘수박’이었다. 국민을 위해 군대를 버리고 매솟으로 왔다.” 20년 가까이 군에 복무했던 세인(40대·가명)은 쿠데타 이후 한동안 ‘수박’ 노릇을 했다. 겉은 녹색이지만 속은 붉은 ‘수박’은 녹색 군복을 입었지만 속으로는 혁명을 지지하며 반군부 진영에 정보를 제공하는 군인을 지칭하는 은어다. 이러한 ‘수박’의 존재는 탈영병과 더불어 미얀마군을 내부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세인은 “시위대에 쉽게 발포하지 못하도록 총알을 바꾸고, 부상당한 시위대를 몰래 병원으로 데려갔다. PDF와 시민들에게도 대가 없이 정보를 줬다”며 “점차 부대원들이 나를 ‘수박’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들키면 죽기 때문에 영리하게 행동해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나 ‘수박’ 생활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어 그는 결국 군을 빠져나왔다. 영관급 지위와 가족이 누리던 안정된 삶을 포기한 선택이었다.
그는 “군부가 국민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이는 것이 싫었다. 쿠데타 이후 군인은 국민의 적이 됐다. 바깥을 돌아다닐 때 사람들이 나를 역겨운 시선으로 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세인은 “군부는 돈 밖에 모르는 도둑놈들이다. 국민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2022년 상반기 매솟으로 온 윈(30대·가명) 또한 탈영한 군인이다. 군부에 잡히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처지여서, 이웃들조차 그가 군인 출신인 것을 아직 모른다. 윈은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군부 편’으로 자라났다. 입대 후에 군대가 시민을 폭행했다는 풍문을 종종 접했으나 “신경 쓰지 않고 내 할 일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결정은 장군들이 내리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생각할 줄도 몰랐다. 그래서 나도 군인으로서 군대를 위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세계관이 뒤집혔다. 그는 “정권을 잡은 이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때리는 것을 직접 확인한 후 ‘이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과 가족, 직업 등 모든 것을 잃었지만 매솟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윈은 “군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이들을 교육해야만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나의 선택, 후회는 없다”
“매 2분마다 미사일이 2발씩 날아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다리를 잃은 상태였다.” 지미(24·가명)는 바지 오른쪽을 걷어 무릎 아래로 이어진 의족을 보여줬다. 그는 2021년 12월25일 미얀마 내 한 난민촌에서 식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그는 “요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쳐들어왔고 미사일이 발포되기 시작했다. 내 바로 뒤에 미사일이 떨어져서 보니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때 많이 죽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지미는 마을로 이송돼 응급 처치를 받았다. 그가 보여준 당시 사진에서 지미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들것에 실려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져 있었다. 지미는 “간단히 마취했으나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가 상할 정도로 입을 악 물었다. 내 비명이 온 난민촌에 다 들렸다고 한다”고 전했다. 자원봉사자들이 그를 긴급 수술이 필요한 수감자로 위장한 뒤 매솟으로 옮겨 수술을 받게 했다.
쿠데타 전까지 지미는 정치 운동에 가담한 적이 없는 대학생이었다. 쿠데타 이후 집을 떠나 국내 실향민과 PDF를 돕는 일을 하다 변을 당한 것이다. 지금도 매솟에서 그는 쿠데타로 학업이 중단된 이들을 위한 교육 봉사, 국민통합정부(NUG) 지원 사업 등 여러 가지 일을 맡아 하루종일 바쁘게 살고 있다.
바쁜 삶은 그가 자신의 상처를 최대한 덜 들여다보려는 방편이기도 하다. 지미는 “집을 떠나면서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다리 한쪽을 잃었지만) 지금 내 상황은 각오했던 최악보다는 괜찮지 않나. 그래서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가끔 지치기도 하지만, 혁명에 가담하기로 결정했고 그걸 돌이킬 순 없다. 이제는 끝까지 가서 이기는, 단 하나의 선택밖에 없다. 나는 내몰린 것이 아니고 선택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군부와의 싸움은 많은 미얀마인에게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상처를 남겼다.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표(21·가명)는 친구들이 군부에 살해당한 이후 카렌주의 정글로 향했고, 그곳 PDF에 합류해 2년을 보냈다. 쿠데타 초기 군부가 ‘언더그라운드(UG·지하활동)’ 활동가들이 있는 건물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이들이 옥상에서 뛰어내려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숨진 이들이 표의 친구들이다. 표는 “군인과 싸우고 싶어서 PDF에 합류해 총 쏘는 법, 대포 다루는 법을 배웠다. 무기를 잡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표는 총 12번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전투에 미숙했을 때 머리를 바깥으로 내놓고 있었는데, 그러다 나를 지키려던 사령관이 대신 죽기도 했다”고 전했다. 정글 생활 또한 험난해 말라리아에 6차례나 걸렸다. 아파서 잠을 자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불면증과 우울증이 함께 찾아왔다. 표는 “정글에는 나처럼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 이들이 많았다. 자살 사례도 있다. 다들 쿠데타 이후에 생긴 증상”이라고 했다.
그는 말라리아와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지난해 말 매솟으로 왔다. 현재는 치료를 받으며 버섯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수익 일부가 CDM 지원금으로 가는, 일종의 사회적 기업이다. 표는 “비록 매솟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봄 혁명’의 일부다. 정신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PDF로 갈 것이다. 무기를 잡는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위험하긴 해도 나라를 위해, 정의를 위해 직접 싸우는 느낌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죽고 싶어도 살아있어야 할 이유는
이렇듯 매솟은 쿠데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의 새 터전이 됐으나, 옆 나라의 불안정을 떠안은 태국 입장에서 미얀마 난민은 달갑지 않다. 난민 중 장기 거주 허가증을 받거나 태국 당국에 정식으로 등록된 이들도 일부 있지만 상당수는 합법적 지위가 없는 ‘숨은 존재’다. 태국의 묵인 없이는 이들이 이곳에 머무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경찰에 적발되면 벌금을 물기도 하고, 범죄나 부당한 일을 당해도 신고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매솟에서 만난 미얀마 난민들은 스스로를 태국 경찰의 ‘인간 ATM’이나 ‘캐시 카우(자금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매솟에 미얀마군 스파이가 돌아다닌다는 소문 또한 난민들을 더욱 숨어들게 만든다. 민주화 활동을 한 혐의로 군부의 체포영장이 나온 슌레이(32·가명)는 매솟에 온 지 꽤 됐지만 아직까지도 시내를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는 “미얀마 음식을 파는 식당이 많이 있지만 그런 곳에 가지 않고 행사나 모임에도 나가지 않는다. 매솟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안전하지는 않다.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슌레이는 “주목을 끌기 싫어서 내가 누구인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이곳에서 나는 돈 주고 산 차명 신분증을 가진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이들이 자신을 반기지 않는 곳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사 출신 영화감독 녜인 녜인 아웅(56)은 혁명이 끝난 이후 미얀마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1988년 미얀마 독재자 네 윈 장군에 반대한 시민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그는 전국 단위 학생 조직에 참여했고, 2021년 쿠데타 이후엔 교사로서 CDM에 동참했다. 군부는 그런 그에게 테러리스트 혐의를 적용해 체포영장을 발부했으며 그의 자택을 압류하고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군부에 ‘찍힌’ 세월이 긴 만큼 잡히면 가혹한 보복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국경을 넘기 전날 밤 많이 울었다. 다른 이들은 목숨을 거는데 나는 살기 위해 떠나려고 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아들이 ‘살아있어야 뭐든 할 수 있다’고 설득해 함께 매솟으로 넘어왔다”고 말했다. 녜인 녜인 아웅은 “내가 매솟에 있는 건 ‘봄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있어야 했다”며 휴대폰에 저장된 무수한 후원 증서를 보여줬다. 태국 복권을 팔아 번 돈의 일부를 보낸 것이다. 후원처는 군부에 저항하다 생계가 끊긴 이들, NUG 등 다양했다.
매솟에 와서 그는 ‘봄 혁명’과 미얀마의 난민촌, 인권 문제 등을 다룬 영화를 제작하며 자신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일부 작품은 시민단체 등에서 상도 받았다. 그는 “우리가 한때 누렸던 삶을 반드시 되찾고 싶다. 미얀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 언젠가 미얀마로 돌아가 재건과 번영에 내 노력을 바치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디디(22) 역시 매솟에 온 이후로 ‘죽지 말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자 애썼다. 그는 미얀마에서 2016년부터 활동한 메이크업 아티스트이자 트랜스젠더로, PDF와 UG 활동을 하다 군부에 적발돼 지명수배 명단에 올랐다. 군부는 그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그의 엄마를 체포했다. 디디는 “엄마는 그때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고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됐다. 나 역시 매솟으로 오는 길에 당한 총격과 성폭력 등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탓에 여러 차례 자살 시도를 했다”고 전했다.
디디는 “엄마가 체포됐을 때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란 고민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나와 엄마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자유를 위해서 저항한 것이었다”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 승리하면 미얀마는 더 발전한 나라가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혁명이 끝나면 미얀마에 돌아가서 폭력을 몰아내는 일에 동참할 것이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 ‘우리는 미얀마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매솟 | 김서영 순회특파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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