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75' 하야카와 감독 "고령자의 삶 생각해보는 계기 되길"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일본에서 이 영화를 본 젊은 사람들이 '예전엔 내가 사는 세상과 노인들이 사는 세상은 완전히 별개라고 생각했는데, 노인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해졌다'고 하거나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어르신들에게 말을 걸어 봤다'고 하기도 했죠. 한국에서도 청년과 고령자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단 말을 들었어요. 이 영화가 (청년과 노인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서로의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30일 서울 마포구의 한 서점에서 만난 일본의 주목받는 신예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장편 데뷔작 '플랜 75'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서 2022년 개봉한 이 영화는 국내에선 다음 달 7일 개봉 예정이다.
'플랜 75'는 초고령화가 진행 중인 일본 사회의 가까운 미래를 상상력으로 그려낸 SF 영화다.
영화 속 일본 사회는 고령자 복지를 위한 재정 부담이 커지면서 노인 혐오가 확산하고, 정부는 고령 인구를 줄이기 위해 '플랜 75'라는 정책을 시행한다. 75세 이상 고령자가 이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10만엔(약 90만원)과 일정 기간 개인별 상담 서비스를 받고 안락사하게 된다.
하야카와 감독은 2016년 일본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에서 20대 청년이 장애인 시설에 침입해 19명을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이 작품을 구상했다.
그는 "당시 '장애인은 가치가 없다'고 한 범인의 진술에 정말 충격받았다"며 "생산성 같은 걸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게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심각한 위기감을 가졌다"고 말했다.
장애인과 노인은 사회적 약자란 점에서 동일하다. 하야카와 감독은 "고령자의 이야기를 하기로 한 건 누구나 나이가 들기 때문에 좀 더 자기 일로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노인과 같은 약자를 혐오하는 현상에 대해 "사회적 불만의 화살이 (그것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를 향하는 게 아니라 약자들을 향하는 것으로, 매우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고령화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이 영화엔 일본 사회의 특수성도 깔려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극도로 꺼리는 일본 문화에서 노인들이 스스로 쓸모없고 사회에 짐이 되는 존재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그만큼 쉽다는 것이다. 영화 속 노인들은 이런 의식 때문에 '플랜 75'에 참여한다.
'플랜 75'의 주인공 78세의 미치(바이쇼 치에코 분)도 마찬가지다. 실직으로 소득이 끊긴 미치는 정부 복지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도 굳이 일자리를 찾으려다가 실패하자 '플랜 75' 신청서를 쓴다.
하야카와 감독은 "미치는 궁지에 몰리는 캐릭터지만, 불쌍하거나 비참하게 그리고 싶지 않았다. 굴하지 않는 강인한 아름다움을 가진 캐릭터이길 원했다"며 "관객들이 '미치가 죽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배우를 찾을 때 바이쇼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 영화에선 '플랜 75'에 참여해 안락사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유품을 정리하는 필리핀 출신 노동자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가 나온다. 아리안은 아버지가 일본인, 어머니가 필리핀인인 배우다.
하야카와 감독은 "노동력이 부족한 일본에서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가 많은 현실을 반영한 면도 있지만, 필리핀인들이 가족과 커뮤니티 등 인간적 유대가 강하다는 점을 고려했다"며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개인이 고립되는 일본 사회와 대조하려고 필리핀인 캐릭터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1976년 도쿄에서 태어난 하야카와 감독은 미국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의 단편 '나이아가라'(2014)는 제67회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됐고, 제1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최우수상을 받았다.
'플랜 75'는 하야카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가 연출한 동명의 단편은 신예 감독 다섯 명이 일본의 미래를 조명한 옴니버스 영화 '10년'에 실렸다. '10년'의 기획과 제작을 주도한 사람이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다.
하야카와 감독이 '10년'에 실린 단편의 이야기를 확장하면서 장편 '플랜 75'가 탄생했다. 이 영화는 제75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돼 황금카메라상 특별 언급에 올랐다.
하야카와 감독은 차기작에 대해선 "이번 영화와는 달리 어린이가 중심인 가족 이야기"라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에 집중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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